▲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의 영정.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실학, 철학, 문학, 법학, 의학, 공학, 지리학 등 다방면에 다재다능한 능력을 발휘한 올라운드 플레이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함께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발명가, 저술가, 시인이면서 철학자였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권력을 둘러싸고 사색당파(四色黨派)들이 격하게 대립하던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의 나주 정씨 가문은 대대로 왕의 자문기구인 홍문관(弘文館) 관리를 배출한 '8대옥당(八代玉堂)' 가문이었다.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이다. 어머니 해남 윤씨 또한 대단한 가문이다.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문인화의 대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다. 이렇게 명문가의 DNA를 물려받은 천재 정약용은 네 살 때 천자문을 떼고 열 살에 자작 시집을 낼 만큼 총명했다. 그러나 다들 알고 있듯이 조선후기 천재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당파 싸움의 희생양 된 조선의 천재
그는 15살 때 서울의 명문가 풍산 홍씨 집안의 규수 16살 홍혜완과 결혼한다. 다산보다 1살 연상이었다. 22살 진사 시험 합격 후 사은회에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풍운지회(風雲之會)'가 이루어진다. 바람과 구름의 만남, 즉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신하가 만나는 '운명적 순간'이었다.
28살이 되던 1789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 초계문신을 거쳐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로 승승장구한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킨다. 이 일은 훗날 다산의 발목을 잡는다.
39살이 되던 1800년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벽력이었다. 다산은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옷깃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라고 애통해하며 그때의 심정을 시문으로 남겼다.
어린 왕 순조의 즉위와 함께 다산 가문은 위기에 빠진다. 20대 초반에 나라에서 엄격히 금했던 천주교에 심취했던 다산 형제들의 이력이 불거졌다. 11살짜리 왕을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잡은 노론 세력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이른바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사형에 처해졌다.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천주교를 배교(背敎)하여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로 감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