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전주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시가지 모습.
이영천(동학농민혁명기념관 촬영)
청나라 군대가 움직이자, 조선과 청나라 정보에 온통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던 일본도 출병을 준비한다.
치열한 완산 전투
4월 29일부터 쏟아진 대포는 5월 1일이 되어도 그칠 줄 모른다.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고, 백성은 아우성친다. 백성을 구하자는 전쟁 아니던가. 수천 군사로 남문 밖 곤지산을 공격해보나 패하여 후퇴하고 만다. 산 위 참호에서 월등한 화력으로 방어하는 관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무작정 진격은 한계가 농후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에 혁명군은 새로운 전술을 구상한다. 외곽 부대로 완산을 포위하여 장기 농성하자는 옥쇄작전이다. 관군의 군량미와 포탄, 탄약에 한계가 이를 때까지 시일을 두고 포위하는 작전이다. 즉시 통문이 날아간다.
여러 날을 두고 싸우던 중 돌연 바라보니 동학군 한 부대가 금구현 원평으로부터 청도원 고개를 넘어 완산칠봉 서남 방면으로 들어오고 또 다른 부대는 순창에서 임실 등지를 거쳐 만마관으로 들어 완산의 동남방으로 에워싸는 바람에, 관병은 이제 사면으로 적에게 둘러싸였으며 겸하여 보급로가 끊어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홍계훈은 한쪽으론 동학군을 향해 휴전을 청하고, 다른 쪽으론 정부에 보고하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2202 의역 인용)
5월 2일도 여전하다. 수많은 백성이 죽고, 집이 불탄다. 또한 기관총 사격으로 길거리마저 돌아다닐 수 없다. 포격은 이성계 영정을 보관하던 경기전 한쪽을 부수고서야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