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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구해준 전우 찾아 미국에서 남해까지... 57년 만에 재회

김지항 유공자, '생명의 은인' 방재윤 유공자 만나기 위해 남해 방문

등록 2024.05.10 14:56수정 2024.05.1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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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은 잊기 힘든 존재다. 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자기 목숨을 바쳐가면서 구했던 전우를 반세기가 지나 건강한 모습으로 재회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방재윤·김지항 월남전 참전유공자 두 전우의 시공을 초월한 사연이다.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사업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가 이어준 두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보자.

노인이 돼 만난 20대 청년들
 
 방재윤(오른쪽) 월남전 참전유공자와 김지항(왼쪽)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투망작전 이후 57년 만에 재회했다. 두 전우가 지난달 28일 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남해유배문학관 특별전시장에서 만나 기쁨의 포옹을 하고 있다.
방재윤(오른쪽) 월남전 참전유공자와 김지항(왼쪽)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투망작전 이후 57년 만에 재회했다. 두 전우가 지난달 28일 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남해유배문학관 특별전시장에서 만나 기쁨의 포옹을 하고 있다.남해시대
지난달 28일 오전 10시 남해유배문학관 내 흔적남기기 특별전시회장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바로 방재윤(78·남해읍 선소마을)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57년 만에 김지항 전우를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흔적남기기 추진위 이충방 위원장, 서상길 사무국장 등 월남전 참전유공자 동료들도 함께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지항(79) 유공자가 차에서 내렸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내 재회하게 됐다.

"어찌 젊을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정말 자네가 맞는가." 

눈가가 촉촉한 두 전우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끌어안으며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느덧 8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됐지만, 이 순간 만큼은 20대 청년이었다. 

방재윤 유공자는 경기도 가평군에서 태어나 군대 제대 후 남해읍 선소마을로 이사와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다. 19세가 되던 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제1여단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기수는 164기, 군번은 9320555다. 


김지항 유공자는 충남 온양(현 아산시) 출생으로 서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22세의 나이로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해병대 172기, 군번은 9325468이다. 두 유공자는 월남전에서 짜빈박전투, 투망작전 등에 참전한 바 있다.

김지항의 새 이름 '쎄무워카'
 
 방재윤(왼쪽) 월남전 참전유공자와 김지항(오른쪽)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57년 만에 만나 악수하고 있다.
방재윤(왼쪽) 월남전 참전유공자와 김지항(오른쪽) 월남전 참전유공자가 57년 만에 만나 악수하고 있다.남해시대
 
김 유공자도 방 유공자가 입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속부대로 합류했다. 이에 앞서 김 유공자는 월남전에 자원했고 특수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김 유공자의 부대는 1진과 교대하기 위해 조직된 청룡부대 2진이었다.


훈련 중 여가 시간, 어김 없이 장기 자랑이 시작됐고 김 유공자에 앞서 몇몇 병사들이 군가를 불렀다. 김 유공자는 기발한 노래가 없을까 고민하다 당시 영화 새드무비(Sad Movie)의 주제가에 가사를 붙였는데, 가사에는 해병대만 신었던 군화인 '쎄무워카(육면가죽 전투화)' 내용을 넣어 불러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김 유공자는 `김지항`이라는 이름보다 `쎄무워카`라는 별명이 더 익숙해지게 됐다. 이 노래는 부산항에서 맹호부대(육군 수도사단)와 함께 베트남으로 출항할 때 해병대원들이 같이 불러 화제를 불러 모았다. 

베트남에 도착한 김지항 유공자는 방재윤 유공자와 소대가 같았다. 이에 대해 방 유공자는 "쎄무워카(김지항 유공자)가 우리 소대로 온다는 소식에 기대했고, 만났을 때는 건장하고 똘똘하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두 전우의 소대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김 유공자가 대대본부로 차출당했기 때문이다. 김 유공자 회고록에는 "10중대 3소대 진지에서 쉬고 있는데 대대본부 작전 보좌관인 강용신 대위가 소대장에게 무전을 했는데, 3소대에 '쎄무워카'라는 별명을 가진 자가 있느냐"라며 "최 소대장이 현재 BAR(브라우닝 자동 소총) 사수로 근무하고 있다고 하자, 그를 대대본부로 보내라고 명령을 한다"라고 기록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
 
 생명의 은인과의 포옹에 김지항 유공자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생명의 은인과의 포옹에 김지항 유공자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남해시대
 
몇 달이 지났을까? 두 사람의 끈끈한 전우애와 57년을 초월한 만남이 이뤄지게 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주월한국군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짜빈박 전투(1967년 1월 5일~1월 10일), 투망작전 중 일어났다.

이 사건은 김 유공자의 인터뷰와 회고록을 바탕으로 소개한다.

1967년 1월 10일 청룡여단 3대대 본부는 9중대와 함께 지휘 본부 기지로 복귀했다. 기존 복귀 수단은  헬리콥터였지만 불행하게도 오후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면 헬리콥터는 저공으로 비행해야 하기에 적군으로부터 사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 이 방법은 무산됐다. 이에 3대대 본부는 행군으로 작전지역을 벗어나 트럭을 지원받기로 미군과 협의했다.

오후 2시 김 유공자는 대대장, 작전장교, 통신병 등과 함께 복귀 행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논두렁 길을 지날 때 매복해 있던 베트콩들의 AK47 소총 소리가 들렸고, 김 유공자의 왼쪽 대퇴부, 엉덩이 부위에 뜨거운 불덩이가 쑤시며 들어왔다. 김 유공자는 "아직 안 죽었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대대장과 작전장교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렇게 김 유공자는 베트남의 짜빈박의 논바닥에서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총성은 멈췄고, 첨벙첨벙 물을 차면서 달려오는 해병대원 둘.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방재윤, 김평태 유공자였다. 방 유공자는 "헬기 못 타면 진짜 죽는다"라며 김지항 유공자를 업었고, 김평태 유공자가 뒤를 받쳤다. 몇 번이고 넘어졌지만 김지항 유공자는 헬리콥터에 몸을 실었고 후송을 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방재윤 유공자의 증언에 따른 내용이다.

방 유공자와 김평태 유공자도 헬리콥터에 타려고 하자, 베트콩들의 사격이 시작됐고 헬리콥터는 문도 닫지 않은 채 이륙했다. 총소리에 두 사람은 납작 엎드려 포복했지만 김평태 유공자는 이미 전사한 상황, 이를 알아챈 방 유공자는 논두렁 밑 냇가로 뛰어들어 나무뿌리를 붙잡고 밤을 샜다. 숨만 겨우 쉬면서.

본인도 죽을 수 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 유공자를 구한 이유에 대해 방 유공자는 "해병대 정신이었다. 전우가 쓰러져 있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었겠느냐. 선택에 후회는 없다. 지금도 그때로 돌아가면 같은 선택을 하겠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흔적남기기가 이어준 만남

김지항 유공자는 전역 후 1980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현재는 미국 플러턴시에 거주하고 있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자신을 구해준 방재윤, 김평태 두 사람을 잊지 못했다.

김 유공자는 "내 몸에 항상 총알이 박혀 있는데 어찌 잊겠는가"라며 "나를 살려준 두 사람과 재회하는 꿈도 많이 꿨다"라며 울컥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을까?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남기기 사업 추진위원회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2개 단체가 있기에 가능했다.

먼저 흔적남기기 추진위는 방재윤 유공자와 인터뷰를 하고 개인물품도 기증받았으며, 이를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에도 공유했다. 그 과정에서 서상길 흔적남기기 사무국장과 조봉휘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조직홍보국장은 계속 소통했고, 조봉휘 조직홍보국장은 남해 유공자들의 사연을 보다 많이 접했기에 방재윤 유공자의 사연도 일찍 접할 수 있었다.

올해 3월, 김지항 유공자는 전우 찾기에 나섰고 조봉휘 조직홍보국장은 곧바로 서상길 사무국장에게 연락했다. 그렇게 양측은 날짜를 조율해 한 달 만에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김 유공자는 자신의 군대 생활을 기록한 회고록인 <'쎄무워카'의 해병진중일기>를 제본해 흔적남기기 추진위에 기증했다. 

57년 세월을 채우기에는 짧은 만남

한나절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을 뒤로한 두 전우의 얼굴에는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다.

김지항 유공자는 "다음에 미국으로 오면 극진히 대접하겠다"면서 "초청장을 보낼 테니 꼭 다시 만나길 소망한다"면서 초대했다.

방재윤 유공자는 "초대에 정말 감사하지만,  당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어려울 것 같다. 오늘이 끝이 아니기에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전쟁터에서 내 목숨을 바쳐 전우를 구한 사연. 서로 생사도 모른 채 살아왔고,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재회한 두 전우. 57년이 지났어도 전우애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남해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월남전 참전용사 #57년만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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