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 5층 석탑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백제 최고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 탁본을 뜨고 있는 전문가들
최미숙
이어 정림사터로 갔다. 보수 중이라며 입장료는 받지 않았다. 저 멀리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백제 미학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유물,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보인다.
넓디 넓은 절터에 탑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가까이 가니 마침 스님과 남자 셋이 1층 탑신부에 얇은 종이를 대고 탁본을 뜨고 있었다. 먼지에 덮여 내 눈에는 띄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석공의 노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전승기 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제목의 비문이라고 한다. 문화재청에서 예산을 받아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하는 사업이라고 했다.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어 든든했다.
마지막으로 사비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백제의 별궁 인공 연못인 궁남지에 갔다. 연잎 몇 가닥이 떠 있을 뿐 아직은 휑했다. 그래도 연못을 연결한 길이 상당히 길어 산책하기에는 좋았다. 공주와 부여는 유물‧유적이 차로 5~10분, 걸어서 20분 안짝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찾아다니기가 쉬웠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에서 부여 답사는 순서와 시간대를 적절히 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오후 서너 시에 부여 초입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을 시작으로 부소산성, 궁남지와 정림사 5층 석탑, 국립부여박물관, 백마강 변의 나성 한쪽에 세워진 불교전래사은비와 신동엽 시비를 보고 나서 임천의 대조사 혹은 외산의 무량사로 향하라고 한다.
순서를 바꾸면 답사의 맛이 반감되거나 황당함을 감내해야 한다고 하는데, 전문가의 말을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다녔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했는데 그만큼의 지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마음으로 느끼고 좋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전문가의 말이니 다음에는 따라해 볼 참이다.
부여 일정을 마치고 둘째 날 숙소인 변산 소노벨 리조트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가까이 있는 채석강으로 나갔다. 해변을 걸으며 일몰을 기다렸다. 부부, 연인, 가족, 단체 관광객도 나란히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수평선을 바라본다. 날씨는 맑았지만 구름이 낮게 깔려 결국 지는 해는 보지 못하고 주변으로 벌겋게 물든 풍경만 사진에 담았다. 그것만으로도 멋지고 만족스러웠다.
2박3일 동안 알찬 여행을 했다. 남들이 한창 일할 때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는 맛도 꽤나 괜찮았다. 퇴직자만의 특권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푸릇푸릇한 초록이 눈과 마음을 정화해 줬다. 우리나라 곳곳 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장소가 많은데 무시하고 다른 나라만 기웃거렸다. 앞으로 도장 깨기 하듯 다닐 생각이다. 어디서든 내가 행복하면 그곳이 천국이다. 거창하게만 생각했던 천국이 바로 내 마음속에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초등학교 수석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사연을 기사로 쓰고 싶습니다.
공유하기
유홍준 선생의 당부를 무시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