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길 위원장강만길 위원장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식인이나 권력자는 아집과 독선에 빠지기 쉽다. 증세가 심하면 자기 생각과 주장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고 금줄을 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와 달리 강만길은 자신이 살아온 족적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부분을 반성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다.
<늙은 역사학자의 고백>은 <내일을 여는 역사> 11호(2003년 2월)의 권두언으로 쓴 역사 에세이다. '역사 에세이'라고 했으나 그동안 역사학자로서 범했던 실책과 실수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참회록'이나 다름없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대학의 역사학과에 입학했으니 역사학을 전공한 지 50년이 넘었다. 역사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최대 과제는 제가 사는 시대의 역사진행 방향과 정도를 가능한 미리 알아내어 열심히 말해 주면서 스스로 굳건히 역사의 길을 걷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평생 동안 역사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실수를 고백하고 반성해야 할 일들도 많다. 특히 이번 대통령 선거를 겪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 절실해졌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가 4·19 항쟁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환희에 젖었던 것은, 군대를 다녀와서 학부를 졸업하고 직업을 가진 한편 대학원에 다니던 20대 후반의 젊은 때였다. 4·19 항쟁이 터졌을 때 그 역사적 정당성을 인식할 수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붕괴까지 내다볼 만큼 항쟁의 역사적 필연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4.19 후 1년간의 '혼란'을 언론이나 여론 일반이 말하는 것처럼 '혼란' 그것으로 보았고, 민주화 과정에서의 불가피성으로 보는 데는 인색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성립된 초기에는 그 반역사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군사정권의 선전에 속아 혼란종식, 질서회복, 국정안정 정도의 인식에 머물렀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3선 개헌 때는 30대 중반의 나이로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어 있었는데, 그때쯤에야 군사독재정권의 반역사성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의 3선개헌이 무엇이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경험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박정희 정권이 7·4 공동성명을 발표했을 때는 그것이 '유신체제'로 가기 위한 '멍석 깔기'였음을 알지 못하고, 군사독재정권에서도 평화통일의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처럼 오판했다. 한때나마 덩달아서 흥분했고, 심지어는 강의 시간에서까지 그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역사를 잘못 본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다. 7·4 공동성명 자체야 역사성을 가진다 해도 그것이 잘못 이용된 것을 당시에는 까맣게 몰랐으니 할 말이 없다.
40대에 들어서서 겪은 저 암울했던 '유신' 체제 아래서도 역사를 잘못 본 일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신' 말기에 박정희 씨의 나이가 60대에 들어섰다고 기억되는데, 그가 스페인의 프랑코같이 종신 집권하거나 내다보면서 '유신' 체제가 앞으로도 10년 이상 지속되는 것이 아닌가 오판하고 걱정했다. 7년이 계속된 '유신' 체제가 도저히 더 지속될 수 없을 만큼 이미 한계점에 온 것을, 역사가 그만큼 진전된 것을 내다보지 못하고 독재자의 자연 수명을 근거로 역사를 전망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유신' 체제에서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했는데, 일부 교수들은 유정희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 발표 때가 되면 전화기 앞을 떠나지 못한다는 말이 교수 휴게실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역사학을 전공한 덕택으로 '유신' 체제의 반역사성을 알고 전화를 기다리는 '바보'들 속에는 듣지 않았다 해도, 명색이 역사학 전공자로서 '유신' 체제가 이미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미리 알지 못 한 것은 역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18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성립될 당시는 이미 50대를 눈앞에 둔 때였다. '유신' 체제의 한계를 잘못 본 것과 같은 부끄러운 경험들이 쌓여서인지 역사 보는 눈이 조금은 덜 흐리게 되었다. 군사독재정권은 이른바 해직 교수들에게 본래 있던 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으로 가면 복직을 허가하겠다 했고, 실제로 어느 대학에서 사람이 와서 그 학교로 오라 했고, 해직 교수 생활 4년으로 인한 생활 외 궁핍이 여러 면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지만, 두말없이 거절하고 계속 버틸 수 있었다.
노태우 군사정권이 끝날 무렵에는 어느새 60대의 늙은 교수가 되어 있었다. 노태우 정권 후에는 더 이상 군사정권이 성립될 수 없을 만큼 우리 역사가 전진하고 있음을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정 즉 김영삼 정권 성립 과정이 혁명적이지 못하고 '신군부' 중심 세력과 타협으로 가능하게 된 데서 오는 역사적 제약성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이은 김대중 정권의 성립 때는 해방 후 최초의 정권교체라 보는 데 동의하면서도 '구군부' 중심세력과의 연합으로 인한 제약성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다.
이제 70대 늙은이가 되어 맞은 1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역사를 보는 눈이 또 한 번 흐렸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투표한 날 몇몇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자연히 선거 결과를 전망하게 되었는데 노무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절반으로 밖에 보지 못했다. 아홉 시경 집에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켰더니 이미 노 후보가 앞서가고 있었으며 이후 한 번도 뒤처지지 않고 당선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달 정도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199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시민운동과 뒤이은 고속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 사회의 참여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젊은 층의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이 얼마나 앞서가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에는 거의 들어가 보지 못하고 겨우 노트북으로 원고를 쓰되 이-메일로 보내는 일조차 남의 손에 빌리기 일쑤인 70대 노인으로서는 빨리 가는 역사를 제대로 따라가기조차 어렵게 되어 버렸다.
역사학자에게는 역사 진행의 방향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역사의 대열이 잘못 간다고 판단될 때 혁명가나 정치가처럼 대열 앞에 나서서 그 방향을 바꾸려 하지는 못한다 해도, 대열을 뒤따라가면서 잘못 가는 것을 열심히 지적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역사 진행의 방향과 속도를 잘못 보는 역사학자, 역사의 대열을 뒤따라가기에도 힘겨운 역사학자가 되어 버리면 십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주석 1)
주석
1> 강만길, <내일을 여는 역사>, 011호, 서해문집, 2003, 10~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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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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