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구층암 삼층석탑 상부
이완우
구층암 요사채 옆에는 2층 기단 위에 3층 석탑 한 기(基)가 서 있다. 3층 석탑이라 이름하지만, 60여 년 전 화엄사 건물 보수 작업에 참여한 편수들이 구층암 일대에 흩어진 석탑 부재를 모아서 그럴듯하게 세워놓은 탑이다.
탑신의 1층 앞면에 여래좌상이 새겨졌는데, 탑의 앞뒷면 배려가 조화롭지 않고 탑의 위치도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부서진 석탑 부재를 다시 쌓아 놓은 탑이지만 역시 천연덕스럽다. 영원히 푸른 하늘, 부서진 모양대로 당당하게 세워진 석탑과 요사채의 기와지붕이 어울려 나름대로 조화롭다.
도연명이나 이백은 복숭아꽃이 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이상향을 노래하였다. 화엄사 구층암은 고사목 모과나무 천연 기둥, 흩어진 석탑 부재로 다시 쌓은 탑, 중생이 주인 같은 거북과 토끼의 목조각 등이 선불교의 파격과 자유로움을 천연덕스럽게 드러내어 별유천지비인간(이백의 시 '산중문답' 중)의 세상으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구층암 요사채는 선방이며 다실이다. 화엄사 주변의 지리산 산록에는 야생차가 자생하여, 이곳 암자는 야생 죽로차(竹露茶)의 향기 가득한 선원이었다. 계곡 물소리 들리는 작은 정자의 탁자에서 암자를 찾은 나그네들은 거리 없이 어울려 차를 마시며 도반(道伴, 함께 수행하는 동료)이 된다.
이날 차 한 잔의 여유에 어느 청년이 가벼운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예전 어린 시절에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향하는 며칠간의 지리산 종주를 출발하며 화엄사를 옆에 두고 지나쳐 갔었는데, 그때 마음에 두었던 화엄사와 구층암을 이십 년이 흘러서야 우연히 찾아오게 되었단다. 인연이 없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천리만큼 멀기 마련인데, 이제야 인연이 닿아 이곳에 머무르며 함께 차를 마시는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화엄사 구층암은 조릿대 숲이 구층암 가는 열린 문이다. 조릿대 숲속의 오솔길을 걷는 가벼운 마음이 구층암으로 들어서는 일주문이다. 화엄사 구층암에는 오랜 세월을 기다린 인연처럼 차 한 잔의 여유가 있다. 지리산 노고단을 넘어오는 구름처럼, 깊은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참 머물렀다 떠나면 된다.
인연이 닿으면 또 어느 세월엔가 이곳에 발길이 닿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