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현초 학생자치회 대의원 회의 모습1
김현정
"형!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앳된 얼굴의 작은 아이가 제법 큰 아이에게 던지는 말이다. 질문을 받은 형이 다시 쉽게 설명하려 애쓰는 모습이 진지하다. 이렇게 3학년부터 6학년 어린이들이 고루 섞인 모둠이 꽤 여러 개이다. 서울율현초등학교 소강당에서 격주마다 열리는 대의원 회의의 한 장면이다.
오늘의 주제는 <율현 어린이들이 실천하는 지구사랑 방법>.
"아나바다 실천하기와 물 아껴 쓰기는 비슷한 의견이기 때문에 하나로 묶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의견 두 개를 묶자고 하셨는데 다른 의견 있으신가요?"
"물은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는 걸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나바다 실천과는 다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회의 진행자는 자원한 어린이 중 뽑힌 4학년생. 동생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모두 진지하게 듣는 모습이다.
"여러분, 우리, 반대의견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수정하지 않고 원래대로 두기로 했죠? 아나바다 실천하기와 물 아껴 쓰기는 각기 다른 의견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회의는 진행자로 뽑힌 어린이가 주도적으로 진행하되 옆에 서 계시던 선생님이 진행자의 역할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조정한다.
"초등학교 단계에서는 민주적인 회의 운영 방식을 교사가 가르쳐 주어야 해요. 회의 때마다 진행자를 뽑고, 뽑힌 어린이가 진행을 이끌되 필요할 때에는 교사가 적시에 개입하여 회의 진행 방식, 약속 등을 상기시켜 주는 거죠. 또 회의 때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섞어서 다른 모둠을 구성하고 있는데 선후배, 친구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요."
학생자치회를 맡은 김해경 교무기획 부장의 이야기. 초등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회의를 해요>라는 단원이 있다. 여기서 회의를 해야 하는 이유, 회의 절차, 참가자 역할에 대해 배운다. 교과서를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회의 절차 등 교과서 지식을 기억하는 수업으로 진행하기 쉽다. 실제 회의 장면에서 민주적인 의사소통 방법을 경험하며 익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이 아닐까?
"철이(가명)야, 너희 모둠은 얘기 끝났어?"
검은색 모자를 쓴 남자아이가 교장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대의원 회의가 끝난 후 전인숙 교장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학급별로 2명 이내로 계절별 대의원을 두고 있어요. 대의원을 뽑을 때에는 방과 후 회의가 가능한 어린이가 참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아이들 구성이 천차만별이에요. 대부분 학교 전교임원은 소위 모범적인 어린이들이 주를 이루잖아요. 우리학교 대의원은 모범적인 아이들도 많지만 마음 속에 화가 꽉 차 있어서 툭하면 터지는 아이, 매우 산만한 아이, 학교에 오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던 아이도 있어요.
각 학급에서 주목받지 않던 아이도 대의원회의에 와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요. 각 학급에서 의논한 걸 가지고 대표로 참여해야 하니 책임감도 갖게 되고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고 느끼는거죠. 더 잘 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조금씩 변하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요. 아까 검은색 모자를 쓴 친구도 보세요. 불렀더니 돌아보며 웃잖아요!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는데 이렇게 변한 거예요!"
중요한 건 '혼자 두지 않는다'는 믿음
율현초는 작년 서이초 사건 이후 2학기부터 TF팀을 구성하여 <학교-보호자 간 건강하고 안전한 소통 체제 구축 계획>을 만들었다고 한다. 학교, 학년, 학급 교육과정 설명회, 1학기 상담 주간, 2학기 수시 상담, 연 4회 학교와 보호자 간담회, 공개 수업 등 보호자와 신뢰를 쌓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한편으로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악성 민원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저희는 <어린이의 발달을 이끄는 율현 교육과정 설명회>에서 보호자가 아이들의 성장을 볼 때 어떤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할지 관점을 제시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어요. 이러한 맥락에서 교사는 학생을 관찰하며 지도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려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즘 학급 사진, 영상 등을 올려주는 선생님들이 많으시잖아요. 처음에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점차 필수적인 것처럼 인식이 되면서 교육이 본연의 업무보다 서비스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봐요.
대신 선생님들이 생활교육, 수업 준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2월, 신학년 집중 연수에서는 올해 우리학교가 중점을 두어야 하는 과제에 대해 전 교사가 함께 논의합니다. 올해는 문해력 향상, 생태전환교육에 중점을 두기로 했어요. 이것을 실질적으로 학년 교육과정에 반영하고 각 학급에서 수업으로 이어가는 거죠."
율현초는 올해부터 밴드, 카톡 등 담임과 보호자의 개별적, 즉시적 소통망을 없애고, 외부 전화가 직접 교실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였다. 담임과의 소통은 이알리미 <서류-제출>로 소통 창구를 단일화한 것. 결석계, 교외체험학습 신청서 및 보고서 등의 서류뿐만 아니라 상담/질의/제안을 서면으로 제출하도록 하였다. 담임은 내용을 확인한 후 보호자와 직접 소통하거나 필요한 경우 학교 관리자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학교가 나를 혼자 두지 않는다'라고 느낄 수 있는 안전망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 안전망은 교사와 아이들과의 만남, 수업을 위한 것이에요. 결국은 혁신학교의 본질인 거죠."
이러한 안전망은 두 가지로 대표된다. <위기학생 지원을 위한 다중지원팀>과 <학년공동생활교육위원회>. 이는 담임과 보호자가 일대일 구도로 가지 않도록 하고, 학교가 함께 아이를 돕고 싶으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학년공동생활교육(위원회)는 동학년회의를 공식화한 것이다.
다만 같은 학년 교사만이 아니라 교육지원팀 등이 함께 하는 공식 위원회라는 점이 일반 동학년회의와는 다르다. 교감, 생활부장, 학년부장, 상담교사, 특수 교사 등이 필요할 경우 함께 협의하고 보호자를 면담하고 학생을 지원하는 것이다. 학급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오직 담임 혼자 해결해야 하는 문제나 책임으로 보지 않는다는 관점이 여기에도 반영되었다.
작년 서이초 사건 이후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꽤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현장에서는 '변한 게 없다'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높다. 법과 제도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그 바탕에 꼭 필요한 게 있다면 바로 공동체적인 학교 문화가 아닐까? 혁신학교가 그 길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초등교사입니다. 올해는 서울교육연구년 연구교사로 잠시 학교를 떠나 관점을 넓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공유하기
"'학교가 나를 혼자 두지 않는다'는 안전망, 혁신학교의 본질"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