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앞표지
창비
홍세화는 누군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제1부 '빠리의 어느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걸었다. 마냥 걸었다.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수없이 뇌고 또 되뇌면서 정처 없이 걸었다. 값싼 포도주 한 병을 사서 병나발을 불었다. 유유히 흐르는 쎄느 강물에 지나간 순간순간이 비쳐 흘러갔다.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파리에서 택시운전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임시면허를 따기 위한 필기시험을 치러야 했다. 제일 어려운 것은 받아쓰기였다고 한다. 세화 형이 택시 운전대를 잡은 것은 생계를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는데, 다시 읽은 책에 의하면 좀 달랐다. 그에게도 노동자로 살고 싶은 꿈이 있었고, 그의 오랜 꿈이 파리에서 실현된 것이었다. 홍세화는 전태일의 영향을 받은 첫 세대였음을 나는 몰랐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의 학생운동에 대단한 충격을 가져다줬다. 그 영향으로 많은 학생들이 노동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선반이나 용접 기술을 배워 현장에 뛰어드는 학생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택시 운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48쪽)
남민전에 가입했다는 것으로 20년 동안 망명자로 살아야 했으니 그의 외로움은 얼마나 지독했을까? 그는 자신을 '삼중의 이방인'이라고 자술했다. 그는 프랑스 사회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이방인이었다.
"그 사람 위험한 사람이니 접촉하지 마라. 파리에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파리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로부터도 '위험분자'로 취급되는 '이방인 속의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통일운동가들로부터도 왕따를 당했다. "그 사람 수상한 데가 있어. 안기부가 심어놓은 끄나풀이야." 홍세화의 귀에 들려오는 소문은 이런 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성인
홍세화는 부모의 품에서 자라지 않은 모양이다. 외로울 때면 그가 찾는 이름은 '할머니'였다. "나는 왜 여기 있나? 할머니를 남겨두고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1947년 홍세화가 태어난 곳은 종로구 연건동 298-9번지였다. 네 살에 6.25를 겪었다. 동생 민화가 민족상잔 속에서 죽었다. 세화는 세계평화를 염원해 지은 이름이고, 민화는 민족의 평화를 염원하여 지은 이름이다.
어려서 골목길에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술래잡기를 하며 자랐다. 제기차기를 잘했다고 자랑하는 저자의 회고가 보기에 귀여웠다. 사춘의 시절엔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미쳤다. 경기고 재학 시절,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를 했고, 며칠간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거친 밥을 먹었다.
알고 보니 그는 서울대학교를 두 번 다녔다. 66학번으로 서울공대 금속공학과를 다녔고, 69학번으로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멋진 외교관이 돼 조국 통일의 역군이 되리라 꿈꾸었던 대학생 홍세화는 한미행정협정을 알고부터,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미군 병사는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린다는 법 조항을 알고부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정구와 함께 빈민 야학에 뛰어들었다. 임진택과 함께 연극반에 가담했다. 김지하와 함께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을 맞이했다.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는 대학생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계엄령을 발동했다. 위수령이었다. 그 한가운데 홍세화도 서 있었다. 보안대원들에게 연행돼 서빙고동에 끌려갔다. 군대에 끌려갔고, 관악 캠퍼스로 돌아온 것이 1976년 8월이었다.
1977년 졸업을 하고 시작한 것이 학원 강사였다. 그 무렵 다시 만난 이가 박석률이었다. 박석률은 광주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계림초등학교를 나왔다. 광주서중학교의 수재였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경기고에 들어갔으나, 박석률은 아버지의 소원을 배반했다. 홍세화와 박석률은 반항아였고,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다. 둘은 동토의 땅 남한에 민주주의와 통일을 기리는 한 그루 묘목을 심기로 약조했다. 그 나무의 이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 약칭 남민전이었다.
1980년대 <나의 칼, 나의 피>라는 시집으로 시대의 나팔수가 됐던 김남주도 남민전이었다. 남민전이 이루어놓은 실천의 성과는 미약했으나, 김남주와 홍세화, 박석률의 나뭇가지에서 자란 정신의 열매는 볼만했다.
홍세화하면 떠오르는 말이 '똘레랑스'다. '당신이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존중하라.'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똘레랑스'이다. 나는 홍세화가 '똘레랑스'의 전도사라는 세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2500년 전 공자가 설파한 인(仁)은 '똘레랑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이루고 싶으면 남이 먼저 이루도록 하라.'(己欲立而立人)
그의 49재가 다가오고 있다. 홍세화의 발자취에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는 20년이라는 세월을 망명자로 살면서 이방인의 외로움을 견뎠다. 귀국해 그는 또 한국 사회의 변방에 머물렀다. 그랬기에 그는 잘못 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쓴소리를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떠나기 전 그는 불우한 청소년 재소자를 위해 자금을 마련해주는 은행, '장발장은행'을 세웠다.
홍세화, 그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한 마리 반딧불이 아니었을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성인이었다. 그와 같이 정직한 분을 또 볼 수 있을까?
황광우 (<사단법인>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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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홍세화 선생 49재, 추도사 대신 올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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