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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홍세화 선생 49재, 추도사 대신 올리는 글

한국사회 어두운 곳 밝혔던 시대의 지성인... 그와 같은 분 또 볼 수 있을까

등록 2024.05.27 12:17수정 2024.05.2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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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선생이 타계하셨다니 황망하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선생의 떠남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누구로부터도 들을 수 없는 '지혜의 맑은 이야기'를 더는 듣지 못하게 된 때문일 것이다. 생전에 선생이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의 몇 가지를 옮겨 적는 것으로 추도사를 대체하고자 한다. 

"나는 몹시 화가 나"
 
 20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20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연합뉴스
 
1999년 6월 16일 낮 광화문의 한 음식점에서 '파리의 망명객' 홍세화(52)와 남민전의 전사 박석률이 만났다. 둘은 경기고의 교문을 함께 넘은 사이였다. 1979년 헤어져 20년만의 재회였는데, "이게 얼마만이냐?" 흔한 인삿말도 나누지 않았다. 둘은 웃기만 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박석률이 말했다. 

"세화야, 이제 보니 너도 많이 늙었다." 

한 잔 술에 불그레해진 홍세화의 얼굴에 엷게 웃음이 번졌다.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며, 말을 아끼는 법이다.

홍세화와 박석률은 '남민전의 전사들'이었다. 1977년 박석률의 권유로 홍세화는 대뜸 남민전에 가입했다. 1978년 여름 어느 날, 홍세화는 동대문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애드벌룬을 들고 걸었다. 애드벌룬으로 '삐라'(쩐단)를 살포하는 야심찬 기도였다. 물론 박정희 유신 독재를 타도하자는 삐라였다. 

홍세화가 망명한 것은 남민전 때문이 아니었다. 1979년 10월 프랑스에 잠시 체류하고 있었는데, 남민전 사건이 터졌고, '대남적화테러단'의 명단이 공개됐다. 거기에 홍세화의 이름이 들어 있었고, 이후 홍세화는 조국에 올 수 없는 불귀의 망명객이 돼 버렸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박석률은 꼬박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5년인가, 박석률은 또 감옥에 들어갔다. 한편, 홍세화는 1995년에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썼다. 장안의 지가를 올리는 화제의 작품이 됐다. 


홍세화 : "나보다도 집사람이 무척 들어오고 싶어 했어. 오니까 좋다. 그런데 좀 창피해. 한 일도 없이 이름만 팔게 됐으니 말이야."

박석률 : "구리에 있던 네 신혼집, 기억 나? 우리가 벽지 도배해주고 자장면 먹고 참 좋았잖아."



이날 홍세화는 식당에서 '불낙전골'이 무엇인지, '생비'가 뭐고 '익비'가 무엇인지 몰라 당황했다. 20년 동안 변한 것은 강산만이 아니었다.

홍세화 : "공항에서 한강을 따라 들어오는데 서울이 참 많이 바뀌었더라. 삶의 공간은 편리하게 바뀌었는데, 인간적인 색채가 안 느껴져. 서울은 빠른데,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곳이 보이지 않아."

어눌하게 천천히 귀국의 소감을 피력하는 홍세화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철학의 빈곤'을 지적하고 있었다. 박석률은 동동주로 목을 축였고, 홍세화는 담배를 빼 물었다. 박석률은 세 차례의 옥살이를 한 전사답게 급진적이고 원칙적인 체제 변혁을 주장했고, 파리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들어온 홍세화는 의식의 변화와 점진적인 개혁을 강조했다. 

홍세화 : "난 파리에 머물면서 소외라는 걸 많이 생각했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아실현에서 소외돼 있는 거야. 생존 때문에. 지식인들, 예술가들은 소외된 삶을 사는 이들을 배려해야 해. 엄청난 사회적 책무를 느껴야 해. 소외된 삶을 강제당하는 이웃들에게 특권층들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걸 보면 나는 몹시 화가 나.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짧은 추도사를 쓰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장례식장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있었다. 신영복 선생의 장례식엔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으나, 홍세화 선배의 장례식은 조용했다. 미망인께서 슬픔을 참고 있었다. 구천으로 가는 길에 국화꽃 한 송이를 얹었다. 생전 세화 형이 나에게 한 언약이 잊히지 않았다. "부인의 건강만 회복되면, 나는 광주에 살고 싶어요." 

돌이켜 보니 우리는 밤늦도록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떠나고 보낸 자리엔 늘 서운함이 남는가? 2000년 어느 날, 처음 만난 이후 내가 세화 형의 음성을 옆에서 들은 것은 고작 두세 차례였던 것 같다. 광주에서 강연이 있으면 나는 가끔 강연의 뒤풀이 자리에 꼈다.

2012년이었을까? 내가 이끄는 '고전공부모임'의 야회(夜會)에 초대해 맥주를 함께 마신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세화 형에게 짓궂은 질문을 했다. "선배님, 지금까지 출간한 책이 여러 권인데, 도합 몇 부나 나갔습니까?"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답했다. "70만 부." 

2015년이었을까? 홍세화 선배는 한 번 더 광주에 왔다. 그때도 나는 물었다. "선배님, 형수님 건강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광주로 이사하겠다는 형의 언약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이후 나는 세화 형을 뵙지 못했다. 

경기고의 교문을 출입한 수재들은 많으나, 내가 마음에 담은 사람은 세 분이다. 우리에게 <전태일 평전>을 선물하고 먼저 가신 조영래 선생, 민주노동당의 일꾼 노회찬 동지, 그리고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선배다.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앞표지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앞표지창비
 
홍세화는 누군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제1부 '빠리의 어느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걸었다. 마냥 걸었다.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수없이 뇌고 또 되뇌면서 정처 없이 걸었다. 값싼 포도주 한 병을 사서 병나발을 불었다. 유유히 흐르는 쎄느 강물에 지나간 순간순간이 비쳐 흘러갔다. 갈 수 없는 나라, 꼬레."

파리에서 택시운전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임시면허를 따기 위한 필기시험을 치러야 했다. 제일 어려운 것은 받아쓰기였다고 한다. 세화 형이 택시 운전대를 잡은 것은 생계를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는데, 다시 읽은 책에 의하면 좀 달랐다. 그에게도 노동자로 살고 싶은 꿈이 있었고, 그의 오랜 꿈이 파리에서 실현된 것이었다. 홍세화는 전태일의 영향을 받은 첫 세대였음을 나는 몰랐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의 학생운동에 대단한 충격을 가져다줬다. 그 영향으로 많은 학생들이 노동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선반이나 용접 기술을 배워 현장에 뛰어드는 학생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택시 운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48쪽)

남민전에 가입했다는 것으로 20년 동안 망명자로 살아야 했으니 그의 외로움은 얼마나 지독했을까? 그는 자신을 '삼중의 이방인'이라고 자술했다. 그는 프랑스 사회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이방인이었다.

"그 사람 위험한 사람이니 접촉하지 마라. 파리에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파리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로부터도 '위험분자'로 취급되는 '이방인 속의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통일운동가들로부터도 왕따를 당했다. "그 사람 수상한 데가 있어. 안기부가 심어놓은 끄나풀이야." 홍세화의 귀에 들려오는 소문은 이런 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성인

홍세화는 부모의 품에서 자라지 않은 모양이다. 외로울 때면 그가 찾는 이름은 '할머니'였다. "나는 왜 여기 있나? 할머니를 남겨두고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1947년 홍세화가 태어난 곳은 종로구 연건동 298-9번지였다. 네 살에 6.25를 겪었다. 동생 민화가 민족상잔 속에서 죽었다. 세화는 세계평화를 염원해 지은 이름이고, 민화는 민족의 평화를 염원하여 지은 이름이다.

어려서 골목길에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술래잡기를 하며 자랐다. 제기차기를 잘했다고 자랑하는 저자의 회고가 보기에 귀여웠다. 사춘의 시절엔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미쳤다. 경기고 재학 시절,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를 했고, 며칠간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거친 밥을 먹었다. 

알고 보니 그는 서울대학교를 두 번 다녔다. 66학번으로 서울공대 금속공학과를 다녔고, 69학번으로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멋진 외교관이 돼 조국 통일의 역군이 되리라 꿈꾸었던 대학생 홍세화는 한미행정협정을 알고부터,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미군 병사는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린다는 법 조항을 알고부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정구와 함께 빈민 야학에 뛰어들었다. 임진택과 함께 연극반에 가담했다. 김지하와 함께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을 맞이했다.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는 대학생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계엄령을 발동했다. 위수령이었다. 그 한가운데 홍세화도 서 있었다. 보안대원들에게 연행돼 서빙고동에 끌려갔다. 군대에 끌려갔고, 관악 캠퍼스로 돌아온 것이 1976년 8월이었다.

1977년 졸업을 하고 시작한 것이 학원 강사였다. 그 무렵 다시 만난 이가 박석률이었다. 박석률은 광주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계림초등학교를 나왔다. 광주서중학교의 수재였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경기고에 들어갔으나, 박석률은 아버지의 소원을 배반했다. 홍세화와 박석률은 반항아였고,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다. 둘은 동토의 땅 남한에 민주주의와 통일을 기리는 한 그루 묘목을 심기로 약조했다. 그 나무의 이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 약칭 남민전이었다.

1980년대 <나의 칼, 나의 피>라는 시집으로 시대의 나팔수가 됐던 김남주도 남민전이었다. 남민전이 이루어놓은 실천의 성과는 미약했으나, 김남주와 홍세화, 박석률의 나뭇가지에서 자란 정신의 열매는 볼만했다. 

홍세화하면 떠오르는 말이 '똘레랑스'다. '당신이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존중하라.'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똘레랑스'이다. 나는 홍세화가 '똘레랑스'의 전도사라는 세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2500년 전 공자가 설파한 인(仁)은 '똘레랑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이루고 싶으면 남이 먼저 이루도록 하라.'(己欲立而立人) 

그의 49재가 다가오고 있다. 홍세화의 발자취에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는 20년이라는 세월을 망명자로 살면서 이방인의 외로움을 견뎠다. 귀국해 그는 또 한국 사회의 변방에 머물렀다. 그랬기에 그는 잘못 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쓴소리를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떠나기 전 그는 불우한 청소년 재소자를 위해 자금을 마련해주는 은행, '장발장은행'을 세웠다. 

홍세화, 그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한 마리 반딧불이 아니었을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성인이었다. 그와 같이 정직한 분을 또 볼 수 있을까? 

황광우 (<사단법인>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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