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필 작가 김구 피난처에서 안내를 하고 있다.
신채원
대학 1학년, 은행에서 숙직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학생 이명필 작가는 그를 눈여겨 본 직원으로부터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무역학 전공을 살려 중국과 수교가 이뤄지면 중국과의 무역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준비되지 않았던 즉흥적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 대화는 그의 인생을 바꿨다. 반전은 질문을 했던 직원이 7개국어를 구사했으며, 매일 자투리 시간을 내어 이 작가에세 생활 중국어를 가르쳐줬다고.
1년 뒤, 기회는 또 찾아왔다. 짧은 중국어였지만 당시에는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학생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같은 과 대만 유학생의 학업에 도움을 주면서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게 됐으며, 이 작가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대만국립사범대학교 중문과 유학길에 올랐다.
가난한 고학생에게 유학의 기회란 상상하기 조차 어려웠다. 대만에서의 유학생활은 오전에는 어학연수, 저녁에는 식당에서의 아르바이트, 친구의 집에서는 잔디를 깎거나 집안일을 돕는 등의 일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친구의 아버지는 이 작가의 이름 이명필을 인민폐(人民幣)라고 불렀다. 이명필의 이름을 중국어 발음으로 하면 리밍삐, 런민삐(인민폐)는 중국인들에게 잊지 못할 이름이 될 것이라고.
졸업 후 섬유회사에 입사한지 2년 차가 되던 1994년 홍콩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는다. 다이나믹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기업 내 문화와 상품에 대한 정확한 시장판단을 하기에 경력상 무리가 있었기에 회사입장에서는 대단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이 작가는 당시의 홍콩을 총성 없는 전쟁터라고 회상한다. 8년간 홍콩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상하이로 이동하였고, 이후 개인 무역업으로 독립해 현재까지 섬유원료를 수출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사업가 이명필의 '왜 중국이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왜, 독립운동의 길을 걷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