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힌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양상현
외세에는 한없이 무력한 정부가 동족에게는 모질고 포악했다. 사대주의의 속성이다. 일본군의 포악무도한 살육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고 동학군 지도자들이 속속 붙잡혔다. 일본군이나 관군에 붙잡히기도 하고 현상금에 눈이 먼 동포와 동지의 밀고도 있었다.
전봉준·손화중·최경선·김덕명 등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허울뿐인 재판으로 교수형을 받고, 김개남은 서울로 압송 도중에 살해되었다. 최시형은 피신하여 죽임을 면하고, 춘암도 붙잡히지 않았다.
동학혁명으로 도망갔던 수령 방백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고 혹심한 보복을 자행했다. 이같은 행태는 위 아래가 다르지 않았다.
각 군 수재가 다시 정권을 잡음에 도인을 죽임으로써 일을 삼으니 그 목 베어 죽임, 목 매어 죽임, 땅에 묻어 죽임, 태워 죽임, 총을 쏘아 죽임, 물에 던져 죽임의 참혹한 현상과 그 부모·처자·형제가 얽히게 되어 벌을 받음과 그 가산, 밭과 땅, 가축을 몰수함은 만고에 없는 큰 학정이었다. (주석 1)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25만~30만 명이 학살되었다. 대부분 일본군에 의한 희생이었다. 진압 후에는 관군과 유생들에 의해 숱한 사람이 고통을 겪고 고향을 떠나 유랑민으로 살아야 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박인호의 행적은 두 갈래로 알려진다. 박광호·박성희·이춘명·강사여·박준식 등과 경기도 용인군 양지면 정수리에 은거했다(주석 2)는 것과 관군의 추격을 피해 자신을 동학에 안내한 김월화의 집으로 숨었다는 것이다. 김월화와 박씨는 박인호를 집 뒤편 금오산 가시덤불에 토굴을 파고 숨겼다고 한다. (주석 3)
조선왕조 시기 여러 가지 형태의 저항운동이 대부분 1회성으로 그친 데 비해 동학농민혁명은 외세까지 동원된 참혹한 학살에도 지속성을 유지하게 된 것은 종교의 힘이었다. 제폭구민·광제창생·척왜척양의 외적 요인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동학인들은 저항을 멈출 수 없었다. 춘암을 비롯 그의 동지들은 은신하면서 동학의 재건에 나섰다.
해월은 1898년 4월 6일 원주에서 관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 광화문 경무청에 수감되었다가 서소문형무소로 옮겨졌다. 목에 무거운 큰 칼을 쓴 채 공평동의 고등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예비판사 중에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고부군수 출신 조병갑이다. '예비판사'는 유고시에 대타로 나서게 하는 자리가 아닌, 권부에서 파견한 일종의 감시병이었다.
춘암은 자신도 은신하면서 해월의 구속 소식을 듣고 논 십 두락을 팔아 그의 옥바라지 비용 일체를 충당하였다. (주석 4)
재판은 요식행위로 그치고 해월은 1898년 7월 20일 처형되었다. 최제우와 똑같은 '좌도난정'의 죄목이었다.
경성감옥 형장의 교수대에 올라선 해월에게 검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 물었다. "나 죽은 뒤 10년 이내에 동학의 주문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하였다.
선사가 갇혀 있을 때에 북접 대도주와 박인호·김연국 등은 숨어 있으면서 바깥의 일을 주선하고 오직 이종훈은 교론 김준식과 더불어 형제의 의를 맺어 비밀리에 신사의 의복과 음식을 바치다가 신사의 병으로 인하여 삼탕(參湯)을 바치니 신사가 형을 받으신 후 김준식과 꾀하여 밤을 틈타 비를 무릅쓰고 그 시체를 광화문 밖에 거두어 여주 이상하 집에 이르니 이때 의암·구암이 여기서 기다리다가 같이 이상하의 산에 장사 지내다. (주석 5)
민족 종교로서의 동학도(東學道)는 창도자 수운 최제우의 동학 대각(大覺)과 그 초기 포덕 관계에서 이미 동학 교문의 접 조직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도통을 이은 2세 교조 해월의 동학 교리 형성과 교문 형성·확대에 대한 초인적인 역할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민족종교 동학(천도교)으로의 발전과 근대 민족사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동학의 공헌은 있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최수운은 창도로써 동학의 씨앗을 심었다. 그 고귀한 씨앗은 해월의 '은도 시대'에서 발아와 육성을 거쳐 숙성되어, 조선 왕조의 몰락기에 왕조사의 뒤를 이을 근대적 민족 주체 세력이 됨으로써 근대의 민족 융성기를 마련하는 데 정신사적 공헌을 했다고 평가된다. (주석 6)
한국근대 민중운동의 기원은 해월을 원류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부문을 사회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 같다. 해월은 수운 교조의 순도 이후 1878년 개접제(開接制), 1884년 육임제(六任制)를 마련하여 신도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교리연구를 위한 각종 집회를 만들었다. 대단한 전략가이기도 하다.
이런 조직을 기반삼아 1차로 1892년 11월 전주 삼례역에서 충청·전라도 관찰사에게 교조신원을 요구하고, 2차로 1893년 2월 동학간부 40여 명이 광화문에서 임금에게 직접 신원을 호소하고, 3차로 같은 해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명의 교도가 집결하여 대규모 교조신원의 시위를 벌였다. 이 같은 연속적인 집회는 유사 이래 없었던 일이다.
교조신원운동은 좁은 의미에서는 종교내부의 행사같지만, 봉건군주체제에서 다수의 피지배 민중이 집결하여 대 정부(국왕) 요구를 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일종의 모반행위였다. 해월은 '공개적 모반'을 시도하고, 이것은 민중들에게 근대적 시민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감옥으로 몰려가면서 앙시앙 레짐이 무너지기 시작했듯이, 동학의 신원운동은 동학혁명→만민공동회→3·1혁명→4·19혁명·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족운동의 거대한 DNA가 되었다.
주석
1> 천도교,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3>, 304쪽,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5.
2> 조규태, <박래원 일기에 대한 자료 소개>, <동학학보> 제16호, 204쪽, 2008.
3> <신인간>, 1973년 3월호, 68~73쪽.
4> <신인간>, 1973년 90, 91호, 66~67쪽.
5> <천도교서>, 앞과 같음.
6> 신일철, <해월 최시형의 시(侍)와 경(敬)의 철학>, 부산예술문화대학 동학연구소 엮음, <해월 최시형의 동학사상>, 93쪽, 예문서원, 1999.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