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 선생 사진
국가보훈처
해월이 1899년 7월 20일 순교한 후 동학교단은 혼란에 빠졌다. 그의 위상이 워낙 출중하였기에 빈 자리가 그만큼 크고 넓었다. 해월은 생존시에 여러 제자들 중에서 손병희의 신심과 인물됨을 지켜보고 "천하에 의(義)를 따를 자 없도다." 하고 종통(宗通)의 승계자로 점지하였다.
해월은 머지 않아 조정 당국에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손병희를 불러서 후임말기를 요청하고 영도권을 교체하는 상징으로 후계자의 입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얼마 후 그는 처형되고 손병희는 영도의 책임을 맡자 해월이 지어준 의암(義菴)이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손병희가 동학 3세 교조로 임명되는 시기 국내정세는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칭제건원을 하는 등 개혁에 나섰으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는 개혁은 형식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일본·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독일 등 열강의 이권침탈이 극심하여 철도부설권·금광채굴권·어업권·산림벌채권·동해안 포경권 등 국가의 주요자원이 대부분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이에 대항하여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동학혁명의 정신을 잇고자 하는 영학당·활빈당 등이 활동에 나섰으나 전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권력을 잡은 뒤 러시아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1896년 용암포사건이 발생하고, 1904년 2월 8일 일본함대가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동년 2월 23일에는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일본군의 한국내 전략요충지 수용과 함께 한국이 군사상의 편의 제공을 하도록 했다. 이로써 한국땅에 일본군이 공공연하게 주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손병희의 두 어깨는 무거웠다. 흩어진 조직을 재건하고, 두 분 선대 교조의 억울한 죽임을 신원하며, 동학혁명에서 추구했던 보국안민·광제창생·척왜척양의 과업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포함하여 동학간부들에 대한 관헌의 추적을 피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의 지목을 피해 수개월간 은신을 하는 동안 손병희에게는 고뇌와 갈등이 상존하였다. 막상 살아남아서 동학을 이끌어가기로 다짐을 하였지만 시시때때로 가해오는 관의 압박은 손병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어깨에 달려있는 동학을 버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를 동학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기회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손병희는 수련에 정진하는 한편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1899년 4월에는 동학혁명 당시 덕의대접주로 내포지역에서 활약하였던 박인호에게 춘암이라는 도호를 주었다.
이어 7월에는 <각세진경>을, 12월에는 <수수명실록>을 지어 반포하여 교인의 신앙심을 강화하는 한편 포덕에도 주력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1900년 4월 23일 지평군 이종훈의 집에서 입도문을 새로 제정하는 등 교단을 점차적으로 정비해 나갔다. 1901년에는 광주에 모셨던 스승 최시형의 묘를 여주 천덕산으로 이장하였다. (주석 1)
손병희는 김연국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 내부의 불만과 분열상을 인화와 설득을 통해 해결하고자 종통설법식을 열었다. 처음에는 불참했던 김연국 측에서도 그의 성심에 이끌려 참석하고, 손병희를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인 법대도주(法大道主)로 추대하는 데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손병희는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임명하는 등 지도체제와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춘암은 의암과 더불어 손천민·김연국과 나란히 최고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이로써 동학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제3기 체제에 접어들었으나 관헌의 추적은 멈추지 않았고, 각지에서 동학도에 대한 탄압도 줄어들지 않았다. 목숨을 잃거나 재물을 빼앗기는 교인이 수없이 많았다.
손병희는 손병흠·이용구·김학수 등과 함께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사에 은신했다가 군수가 군졸을 풀어 뒤쫓는다는 정보를 듣고 하루동안 충북 제천까지 100리 길을 걸어 피신하였다.
조선천지 어디에서도 그들이 머물 곳이 없었다.
나라의 운명은 점차 어려워지는 데, 정부는 백성들의 힘을 모아 국난에 대처하려 하지 않고 비판세력을 때려 잡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손병희는 제천의 교인 염창석의 집에 은거하면서 교인들이 어려운 시기에도 절망하지 말고 수도에 정진하라는 통문을 반포하는 등 '법대도주'로서의 소임을 다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주석
1> 성주현, <손병희>, 109~110쪽, 역사공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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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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