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 봉기비1894년 10월 삼례에서 재봉기한 동학혁명군을 기리는 봉기비.
이영천
9월 9일, 경기도 안성과 죽산 관아를 동학군이 점령해 버린다. 금강 이남의 움직임엔 상대적으로 느긋하던 조정도, 위협이 턱 밑으로 다가오자 호들갑이다. 부랴부랴 토벌군을 꾸리느라 야단이다.
9월 초, 경상도 예천에서 경상, 충청, 강원도 13개 고을 동학군이 유생 및 조·일 연합군과 맞서는 사태가 벌어진다. 유생들이 집강소를 습격, 포로인 농민군을 낙동강에 생매장해 버린 사건이 발단이다. 대치는 그러나 27일 조·일 연합군의 대승으로 끝난다. 일본군이 사용했다는 미국제 신식소총의 위력이 대단했다는 후문이다. 일본군 화력을 제대로 실감한 충격적 사건이다.
이두황의 토벌군
안성과 죽산이 동학군에 점령당하자 조정은 일본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이두황을 죽산 부사로 성하영을 안성 부사에 임명하여 죽산과 안성을 평정한 후 경기 동부와 충청도를 토벌하라 명한다. 조병갑 못지않은 악한 이두황의 등장이다. 홍주목사 이승우에게는 경기와 충청 해안의 동학군 토벌을 지시한다.
9월 10일 일본군은 용산에 주둔 중인 2개 소대를 차출, 이두황과 성하영 부대에 배속시킨다. 여기에 자진하여 길잡이 노릇을 한 게 교조신원운동의 주인공인 서병학이다.
이러한 소리가 늘 경성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어 묘당에 있는 관리들은 왕에게 아뢰어 동학군을 치자 하였다. 이에 왕은 하교하기를 …(중략)… 이 교지를 받은 죽산 부사 이두황과 안성 부사 성하영이 천여 명의 군병을 거느리고 삼남 대토벌의 임무에 착수하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27~228 의역 인용)
일본의 지원을 받은 이두황과 성하영은 월등한 화력으로 동학군을 토벌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한다. 그 길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남·북접을 가리지 않고 동학도라면 무작정 죽인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살상이었다.
다시, 삼례에서
9월 14일 삼례에서 두령 회의가 열린다. 이를 계기로 대도소를 선화당에서 삼례로 옮겨온다. 선화당을 비운다는 건 다시 혁명군으로 나서겠다는 선언이다. 교조신원운동의 그 춥던 겨울, 너른 삼례 들판을 가득 메웠던 열기가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