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기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
서부원
"어려운 한자어 대신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한자어를 익히도록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휘력과 사고력은 비례합니다."
인솔 교사들 사이에 때아닌 논쟁이 일었다. 관내 중학생들과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답사를 진행하는 도중이었다. 온통 한자어로 된 유적지 안내판을 읽어내기는커녕 우리말로 풀어낸 설명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인 상황을 당혹스러워하며 여러 의견이 오갔다.
비석이나 현판 등에 새겨져 있는 한자는 아이들에게 차라리 '추상화'였다. 의미는 고사하고 한 글자라도 읽어내는 아이가 열다섯 명 중 단 한 명도 없었다. 한자를 배운 적도 없고, 교육과정에 개설된 경우라도 '기타 과목'이어서 마음먹고 공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모의? 작당? 계략? 음모?... '안내판 읽기'도 버거운 학생들
아이들은 '동학혁명 모의탑'에서 '모의'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작당 모의'라고 할 때 그 모의라고 설명하니, '작당'이 뭐냐고 말꼬리 잡듯 되물었다. 역사 답사가 낱말 뜻풀이 수업 비슷하게 진행됐다. 심지어 '모의고사'의 그 모의냐고 물어올 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음모를 꾸미다'라고 설명하면 동학농민혁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될 것 같아 '계략을 세우다'라고 의역했더니, 아뿔싸, '계략'이 무슨 말인지 또 물었다. 한자어를 대체할 우리말을 연신 떠올리느라 자꾸만 말이 꼬였다. 아이들과의 낱말 뜻풀이는 종일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이들은 '고택'을 옛집이라는 뜻으로 읽어내지 못했고, '관아터'를 당시 관청이 있던 자리라고 설명해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관아라는 단어를 어려워했다. 애초 고택 대신 옛집으로, 관아터 대신 관청터라고 표기하지 않은 관련 공무원들의 무관심을 탓하기도 했다.
유적지마다 세상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세', 나라를 돕는다는 '보국', 폭정을 없앤다는 '제폭',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안민', 왜와 서양 세력을 물리친다는 '척왜양' 등 상세한 뜻풀이 없이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한자들로 넘쳐났다. 일정에 쫓겨 더는 낱말 뜻풀이를 해주지 못했다. 한자에 가로막혀 유적지를 직접 찾아와도 역사의 교훈을 깨닫기 힘든 현실인 셈이다.
그냥 '음'이라도 익히라는 취지였을까. 전시관의 동학농민혁명을 소개하는 영상물엔 당시 농민군들이 내건 '제폭구민',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왜양창의' 등의 기치를 아예 우리글로 적어 보여주었다. 한 글자씩 뜻을 풀어주지 않으면 외국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용어들이다.
그러다 보니, 버젓한 오기도 아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에겐 '글자라기보다 그림인' 한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전시관의 '보국안민(輔國安民)'이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기념탑에는 '보국안민(保國安民)'으로 새겨져 있다. 물론, 둘의 뜻 차이도 알 리 없다.
참고로, 앞엣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 뒤엣것은 왜곡된 것이다. '나라를 돕는 것'과 '나라를 지키는 것'은 언뜻 유사해 보이지만, 확연한 차이가 있다. 보국(輔國)은 '왕을 보좌한다'는 것이고, 보국(保國)은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같은 '국(國)'이라도 내포하는 의미가 다르다.
교사들끼리도 한자교육 논쟁... 결론은?
이쯤 되니, 불현듯 지금껏 교육과정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자로 된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아이가 태반인 현실이다. 답사든 독서든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한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한자와 한자어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거칠게 말해서, 한자는 외국어고, 한자어는 우리말입니다."
"한자어가 한자에서 비롯된 것인데, 구별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한자어로 된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알아야 합니다."
평행선을 달리던 논쟁은 돌연 한자 교육의 필요성으로 쟁점이 옮겨졌다. 해묵은 주제인 데다 그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높이고 사교육비의 증가가 우려된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한자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영어 교육에 투자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주장까지 대두됐다. 어휘력 향상을 위한 한자 교육조차 대입과 결부시키는 뿌리 깊은 관행이다.
결국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매번 힘을 잃고 흐지부지됐다. 중학교에선 어렵다는 이유로 한문 교과를 기피하고, 고등학교에서 대입에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선택하지 않는다. 요즘 들어선 명색이 대학생조차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쓸 줄 아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내용에 한자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문화유산 안내판 읽기를 버거워한다. 읽어봐야 이해할 수 없으니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과 얼추 10년 터울의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명이 별반 다를 바 없다. 이해하는 어휘의 수준 차이가 거의 없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