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조골에 숨어 있는 우리나라 최대 붉가시나무

등록 2024.06.17 14:15수정 2024.06.1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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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조골의 붉가시나무
비조골의 붉가시나무완도신문


완도의 진산 상왕봉(604. 象王峰)에서 서쪽 사면으로 흘러내린 산봉우리가 있으니 봉두산((394m, 鳳頭山)이다. 군외면 삼두마을은 봉두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마을이 들어서 있다. 삼두마을은 완도 서부지역의 중심마을로 마을에 많은 지명이 있는데 두읍(斗邑)마을과 삼장안(三莊案)마을이 합쳐지기 전 옛 삼장안 마을로 오르는 골짜기가 비조(飛鳥)골이다.


새가 난다는 비조골은 교통이 발달하기 전 두읍리에서 삼장안으로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고 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가장 빠른 길이어도 지명처럼 새가 난다고 할 정도로 경사도가 가파른 길이어서 다니기에는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원래 삼두마을에는 동백나무가 많았는데 비조골만은 유독 붉가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삼두리와 합쳐지기 전 비조골에는 몇 가구의 주민이 살았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대훈씨는 이곳 비조골에 붉가시나무를 이용하여 귀틀집을 짓고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 붉가시나무로 지은 귀틀집이 50년 전까지도 비조골에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 떠나자 귀틀집은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붉가시나무의 한자 표기어는 가수(柯樹)인데 이를 풀어쓰면 ″도끼자루를 만들만큼 단단하고 야무진 나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가서목(柯樹)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붉가시나무는 이 한자 표현인 '가서목'에서 차용하여 '가시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비조골의 붉가시나무
비조골의 붉가시나무완도신문
 
비조골은 상왕봉을 중심으로 삼장안 마을과 완도의 여러 곳을 잇는 도보교통(徒步交通)의 중심지였다. 비조골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한두재를 넘어 오늘날의 화흥리(花興里)를 거쳐 도암리(道岩里)에 다다르는 완도읍을 오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또 북쪽으로는 미내길이 있는데 미내길로 내려가면 예로부터 인근 섬을 연안여객선으로 연결하는 원동(院洞)에 다다른다. 또 다른 길로는 물맹이재(오늘날 완도수목원 제1전망대)를 거쳐 백운봉(600. 白雲峰)과 상왕봉을 가르는 하느재를 넘어 완도의 동부쪽인 대야리(大野里)에 이르는 오솔길이 있었다.


이 비조골에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붉가시나무가 숨어있다, 어떻게 홀로 떨어져 단일목(單一木)으로 살아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강대훈씨 집터 주변 잡목 속에 숨겨져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은 알 수 없지만 수고가 약 20m, 흉고직경 85cm, 흉고둘레는 258cm로 크기가 주변 나무들에 비해 압도적이다. 수간(樹間)이 통직(通直)하고 수형 또한 매우 웅장하다.

근원(根源)에서 약 2m를 곧게 뻗어 올라 크게 두 갈레로 갈라진 뒤 다시 여러 갈래로 수간이 퍼져있다. 다만 지난 수십년간 주변의 소나무와 잡목에 둘러 쌓여 수간이 상당히 수직으로 뻗어있다. 빨리 식생조사가 이루어지고 나무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보호수 지정을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   


붉가시나무는 나무의 조직이 아주 치밀하고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강해 예로부터 다양한 생활용품과 무기 제작 등에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적선의 배를 뚫을 때 사용된 천자총통(天字銃筒)의 화살이 대장군전(大將軍箭)인데 가리포진(加里浦鎭. 오늘날의 완도읍)에서 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벌어진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은 이순신 장군과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이 연합하여 대승을 거둔 해전으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이끌던 아타케부네(安宅船 あたけぶね)와 세키부네(せきぶね)를 대장군전을 이용하여 모두 격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완도신문

당시에 상왕봉의 붉가시나무로 가리포에서 제작된 대장군전은 몸통 길이 182cm, 최대 지름 9.4cm, 무게 10.6kg이다. 머리에 박았던 탄두(彈頭. 철촉)는 사라지고 없다. 

삼두리 토막이 박진수(76. 군외면 삼두리, 사진)씨의 증언이다.

″비조골은 옛날부터 붉가시나무가 무지하게 많앴어요, 강대훈씨 집 귀틀집이 유명했는디 거그가 샛질의 통로도 기였지만 붉가시나무를 아조 정교하게 짜 맞춰서 멋진 집이었어요. 거그에 네 집이 살었는디 귀틀집은 강대운씨 집 한집이었고 꼭 거그를 거쳐야만 여그 저그를 댕길 수 있었어요.″

″내가 열 여덥덟살 때 여그서 김을 했는디 그때는 전부다 지주식이어요. 일본으로 한창 김을 수출할때라 값이 아조 좋았어요. 김을 만들먼 한박스씩 지고서 걸어서 읍으로 가서 수매를 한디 검수관이 아조 까다로와요" 

"그때 마른김을 등에 매고서 비조골 귀틀집을 지나서 화흥리로 해서 도암리를 거쳐서 읍으로 갔는디 말 그대로 상왕봉을 반틈 돈 것이어요. 그때는 붉가시나무를 전부 숯으로 만들어사 먹고 산께 귀한 나무인지 모르고 지나쳤는디 오늘날은 귀한 나무라 한께 내막은 몰라도 잘 지케사 쓰것구만요.″


소안도의 맹선리상록수림(孟仙里常綠樹林. 천연기념물)에도 붉가시나무가 있다. 또한 함평 기각리 붉가시나무숲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두 곳 다 독립개체가 아닌 숲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비조골의 붉가시나무는 독립개체로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조골의 붉가시나무는 주변 모든 붉가시나무들이 숯으로 구어 질 때도 그 생명을 유지하였다.    

오늘날 완도의 상왕봉은 온통 붉가시나무로 덮여있다. 이 나무들은 50여년 전까지는 숯으로 만들어져 주민들의 생계수단이 됐다. 숯으로 구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수천핵타의 상왕봉 붉가시나무 중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삼두리 비조골의 붉가시나무가 화마(火魔)로부터 잘 보전되어 후세에 영원하길 기원해 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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