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와 함께 꼼꼼히 눌러담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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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인지 일기인지 구분 어려울 잡담이 어느새 한 페이지 가득 채워지고, 그제야 잊고 있던 빗소리가 다시 귀에 들려온다. 혼자만의 고독한 하루가 될 줄 알았는데 신나게 수다 한바탕 끝내고 온 듯한 느낌이다.
문득 노곤함이 밀려온다. 글씨를 쓰느라 그저 손가락이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편지를 받게 됐을 때의 표정을 상상하니 마음이 간지럽다. 여전히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다.
전혀 당연하지 않은 오늘
창밖으로 새하얗게 내리는 비를 구경하다가, 며칠 전 미리 사 두었던 수박 한 통이 떠올랐다. 장마가 지나면 당분간 맛있는 과일은 쉽게 볼 수 없으니 겨울을 대비하는 김장처럼 과일을 저장해 뒀었다. 커다란 수박을 냉장고에서 꺼내 빨간 과육만 잘라 담는다. 평소에는 귀찮은 일이지만 오늘은 왠지 경건하게 해낸다.
마른장마, 지각 장마, 국지성 집중호우, 심지어 일각에서는 '장마'라는 단어 자체가 힘을 잃어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이 지루한 장마마저 기후 위기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최근 충청 지방에는 200년 만에 내린 폭우로 인해 안타까운 인명 피해가 생겼다고 한다. 집 안에서 비와 함께하는 오늘이 당연히 주어지는 건 아니란 걸 기억해야겠다.
이젠 예전처럼 명확한 기간도 아니라서, 오는 8월이나 9월에도 긴 우기가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매일의 꿉꿉함을 잘 견디는 것이겠다. 구석구석 재미를 찾아 마음을 밝혀 놓으면, 제습기를 틀지 않아도 보송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가끔 해가 말갛게 등장하는 날이면,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다고 눈을 반짝이겠지. 그때까지 모두가 이 회색 날들을 무사히, 안전히 지나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