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2일 서울 종로구 경찰박물관에서 관계자가 경찰이 1950년대 사용하던 순찰용 사이드카와 백차(지프차)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사방이 캄캄한 새벽 미명, 영광경찰서 마당에는 시동을 켜놓은 트럭이 있었다. 서장 대리가 조수석에 타자 트럭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광경찰서장 대리와 경찰 간부 몇 명이 새벽 6시 쓰리쿼터 1대에 쌀과 수류탄, 경기관총, 현금 등을 싣고 영광을 빠져나가 함평, 영산포, 영암을 거쳐 마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영광경찰서 경찰들은 사이렌을 울리지 않고 1950년 7월 23일 새벽 후퇴를 했다.
이틀 전 영광군 국회의원 정헌조는 어딘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인민군들이 영광 쪽으로 가고 있어요. 빨리 피난 가시오." 정헌조는 "전쟁이 나면 사이렌을 울릴 테니 그것을 신호로 모두 피난 가시오"라던 영광경찰서 경찰의 말이 생각났다.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는데, 굳이 피난 짐을 싸야 하나?'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하지만 정헌조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영광 경찰과 더 나아가 대한민국 경찰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 사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불과 10여 일 전 영광군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 처형이 그것이다. 영광경찰서에서는 상부 기관의 명령을 받아 1950년 초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과거 좌익 전력자들이 자수해 대한민국에 충성서약을 하면 빨갱이로부터 보호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약속에 따라 영광군 내 젊은이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정헌조의 본가가 있는 영광군 군남면에서도 30여 명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정작 전쟁이 터지자 영광경찰서에서는 면별로 보도연맹원을 소집해 영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다. 그런 후에 1950년 7월 10~11일 사이에 영광면 깃봉재와 고들재, 단주리 사자등, 법성면 법성리, 군남면 검덕산 등지에서 보도연맹원을 학살했다.
그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7월 11일 이후로 영광군에서의 보도연맹원 학살이 멈추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생각하며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경찰을 불신하게 된 정헌조가 피난길에 오른 것은 1950년 7월 21일이었다.
일부러 울리지 않은 사이렌
6.25 전쟁 전에 '만약 전쟁이 나면 사이렌을 신호로 피난을 가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순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영광면(현재의 영광읍)에 살고 있던 내로라하는 우익인사들이었다. 이들과 영광북국민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청년방위대 소속 대한청년단 단원 약 300명은 제대로 철수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반동' '우익인사'로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인민공화국 시절 진행된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됐다.
인민군은 7월 23일 영광에 들어오자마자 치안대를 조직했고, 치안대는 청년방위대 소속 호국군 대위인 조영욱(26세, 국민회 지회장 조두현의 장남)과 경찰관 5명을 체포하여 당일 오전 11시께 북국민학교 동쪽 산중에서 총살했다.
또 25일에는 오후 1시께 영광면 교촌리 소재 향교에서 인민재판을 실시해 영광중학교 학련위원장 박동을(21세)과 그의 여동생인 영광여중 학련위원장 박동삼(19세)을 향교 뒤쪽 밭에서 처형하였다(박찬승, <혼돈의 지역사회>, 2023).
영광 경찰들이 자신들의 안전한(?) 후퇴로 확보를 위해 일부러 사이렌을 울리지 않아 발생한 황당한 사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영광경찰서장 대리와 주요 간부들의 윤리의식이 이렇게 형편없었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사건이 발생하기 약 한 달 전의 서울 상황을 생각하면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다.
인민군은 6월 25일 3.8선을 넘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난 지 이틀 만인 1950년 6월 27일 새벽 2시 대전행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자신은 전쟁이 나자마자 안전한 후방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이승만이 서울을 무사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새벽 3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열렸고 만장일치로 수도 사수를 결의했다.
새벽 5시 육군본부의 긴급 참모회의에서는 '정부나 국회는 후퇴해도 국군만은 최후까지 서울을 사수한다'고 결의했다. 오전 8시, 인민군은 의정부를 지나 창동까지 진입했지만, 정부에서는 이 사실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10시 중앙방송(KBS)에서 이 대통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중략) 국민들은 당분간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므로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민족의 증언1>, 중앙일보사).
이 방송은 대전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전화한 것을 녹음한 것이었지만, 서울시민들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이 방송만을 굳게 믿은 이들은 시민뿐만 아니라 국회의원과 우익인사도 상당수 포함됐다.
그리고 4시간여 후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와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가 폭파됐다. 인민군이 한강 인도교에 도착하기 6시간 전이었다. 당시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피난민(최소 500명)이 사망했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난 가지 못한 서울시민들은 그대로 인민군에 노출됐다.
천석꾼 집안의 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