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자영과 보육원 아이들
아름다운재단 제공
자영의 첫 기억은 4살 무렵의 기억이다. 그런데 그 기억이 꽤나 아픈 기억이다. 4살의 자영은 "내가 엄마라고 여기는 사람이 왜 다른 친구의 엄마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큰 충격을 받아 많이 울기도 했다.
어릴 적에 놀이공원에 놀러가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야 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쳐다봤다. 옆에선 엄마와 아빠 손을 잡고 신난 아이가 지나 다녔지만, 자영과 친구들은 두 줄로 서서 다녀야 했다. 어린 자영은 남들과 다른 모습의 자신을 깨달았다.
자영은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보면서 위로를 얻었다. 콩쥐, 신데렐라, 캔디 같은 캐릭터들이 자영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들에게 건네는 자영의 위로는 사실 자영 자신이 받고 싶었던 위로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 자영은 보육원에서 관심을 받기 위해 '꼴통'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자영은 커 가면서 점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이 역시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보육원 밖의 학원을 다닐 기회도 얻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영이 두려워하던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학원 친구들이 자영이 보육원에 산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 언덕 위의 하얀 집(보육원)에서 산다며?"
자영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6학년이었던 당시의 자영은 함께 학원에 다니던 보육원 친구와 같은 도시락을 먹는다는 걸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락을 챙겨 주신 보육원 선생님의 마음을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학원에서도, 보육원에서도 도시락을 먹을 수 없던 자영은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보육원에서 지낸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학원이 끝나면 보육원까지 전력 질주해서 뛰어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가장 빨리 보육원을 나가겠다"
중학생이 된 자영은 보육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비슷한 환경에서 지내는 친구들과 학교 생활을 하니 이전처럼 놀리던 친구들로부터 시달릴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청소년이 된 자영에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보육원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왜 하필 나일까?"
보육원에서는 마치 군대처럼 정해진 시간표대로 지내야 했다. 오전 6시에 기상하고 기도를 한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학교에 간다. 보육원으로 돌아오면 정해진 시간만큼 자유 시간을 보내고 정해진 시간에 불을 끄고 자야 한다. 이 생활이 매일 반복된다. 물론 보육원 아이들이 안정되게 생활하도록 할 방침이었음을 자영은 알았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그가 느꼈던 답답함이 해소되진 않았다.
고등학생이 된 자영은 목표를 하나 세웠다. 그가 지내던 보육원을 가능한 한 빨리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대학에 진학할지, 직장에 들어갈지 고민하던 자영은 취업하면 보육원을 빨리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결국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자영은 고3 여름방학에 보육원을 나갈 수 있었다.
너무나 힘들었던 직장 생활
보육원을 일찍 나와 직장을 구하면 행복한 삶을 살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에는 정해진 틀 안에서 생활했지만, 성인이 된 자영은 모든 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져야 했다. 공과금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 월급의 어느 정도를 적금에 부어야 하는지, 퇴직금 제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공장에서의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오전과 오후, 야간의 3교대 근무를 하니 몸이 많이 망가졌다. 자립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다.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잠만 자기도 했다. 삶이 점점 무기력해졌다.
직장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에 상처받기도 했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부모님이 없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러면 "부모님이 없다고?"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명절에 고향에 가냐"는 질문에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난처했다.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캠페이너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