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등재된 일본 사도광산 내부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니가타현 사도 광산 내부에 7월 28일 모형이 설치돼 있다. 사도 광산 내부는 에도시대 흔적이 남은 '소다유코'와 근현대 유산인 '도유코'로 나뉜다. 사진은 소다유코 모습.
연합뉴스
한 시간 넘도록 축구 이야기만 하길래, 슬그머니 끼어들어 몽니 부리듯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요즘 아이들이 시사적인 내용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최근 가장 '핫한' 이슈인 데다, 적어도 훌리안 알바레즈라는 부르기조차 어려운 선수 이름보다야 익숙해할 줄 알았다. 인터넷 포털에서도 며칠 동안 맨 위에 배치됐다.
얼마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된 일본의 사도 광산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다. 이는 우리나라 역대 정부 최악의 외교 참사로 비판받고 있는 사안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왔다는 내용을 일본 정부가 누락시킨 사실을 우리 정부가 사전에 알고서도 묵인했다는 의혹에 여론이 들끓고 있다.
"축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그걸 안다고 지금 우리에게 무슨 보탬이 되나요?"
축구는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언제든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소재가 되지만, 생뚱맞게 사도 광산 문제를 들먹였다간 '진지충'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는 거다. 강제 징용과 외교 참사에 대한 문제 제기는커녕 사도 광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가 주로 접속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SNS에선 보지 못 했다고 했다.
아이들도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궁금해할 거라는 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나이로 범주화하긴 섣부르지만, 그들이 궁금해하는 분야는 보통의 기성세대와 사뭇 다르다. 스포츠와 연예계 뉴스가 단연 맨 앞이고, 주식과 부동산 등이 그다음이며, 정치와 시사, 일반 교양은 뒷자리다. 특히 역사나 문학, 철학 동향 등은 아예 거들떠보지조차 않는 분야다.
말하자면, 그들의 스마트폰 알고리즘에서 사도 광산은 아예 없는 단어인 셈이다. 아이들은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과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갈등에서 시작된 확전 일로의 중동 국가들의 전운에 대해서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단 프리미어 리그 선수 중 누가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느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무슨 보탬이 되느냐는 아이들의 반문이 종일 머릿속을 맴돈다. 곡해일지는 몰라도, 사도 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손해 볼 일도 없고, 지정이 되지 않았다고 득 될 일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100년 전 일로 일본을 무릎 꿇게 할 순 없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배짱을 부릴 수 있는 배경일지도 모른다.
참혹한 아이들의 역사 인식
힐끗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워하긴 해도, 친구들 앞에서 막말에 가까운 주장을 스스럼없이 펼치는 아이도 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누구 앞에서건 감히 꺼낼 수 없는 이야기다. 좋게 해석하면, 세계 10대 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일본에 꿀릴 것 없다는 거고, 달리 보면, 치욕적인 과거사를 덮고 가자는 이야기다.
"대체 언제까지 일본 정부에 구걸하듯 위안부와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 사과하라고 외칠 겁니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자의 목소리가 지겹다는 친구들도 있어요. 이제 우리가 일본보다 더 잘살게 된 마당이니, 일본 정부의 역사의식 수준이 딱 그 정도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이런 '망언'에 발끈 화를 내기보다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피해 당사자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면 자연스레 잊힐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거울일진대, 그들의 이렇듯 천박하고 매몰찬 역사 인식은 우리 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지만, '오늘만 사는' 요즘 아이들의 가슴과 머릿속에는 망각할 역사조차 드물다. 동서고금에 시간은 망각의 편이며, 불의한 권력은 허송세월하며 장삼이사들의 망각을 부추긴다. 특히 아이들은 권력과 결탁한 자본에 더욱 쉽게 포획되었고, '보탬이 안 되는' 역사를 과감히 버리는 형국이다.
아직은 소수라고 믿고 싶지만, 이들이 이끌어갈 대한민국 사회의 미래가 두렵다. 지난해 말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비루한 세태를 반영해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가장 많이 꼽았는데, 모든 걸 '보탬이 되느냐'로 판단하는 요즘 아이들에겐 차라리 '진리'다. 그들에게 '견리사의(見利思義)'는 말 그대로 공자님 말씀일 뿐이다.
현 정부 들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퇴행적인 모습이 확연하다.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은 비유적 표현이 아닌 명징한 진실이었다. 누군가 내게 퇴행의 증거를 대보라고 하면, 주저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불과 한두 해 만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교양의 퇴조'가 뚜렷해졌다는 것. 곧,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염치를 잃어버린 사회로 전락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