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재 맞은 편에 있는 남명기념관에 선생의 모습이 있다.
김숙귀
청렴한 기개와 기상, 쉼 없는 학구와 품격 높은 발언으로 그는 조선시대 흔했던 나약한 선비가 아닌 늠연한 서생이었다. 자질구레한 벼슬에 이끌리지 않았고, 물질적인 이욕을 멀리하였다. 그래서 각지의 선비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자세를 바로 잡을 만큼 존경심이 따랐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그리고 견결한 실천 강령을 세우고 실행하였다.
선생께서 닭 울음을 듣고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띠를 매고 서는 자리를 바로 하여 똑바로 앉아 어깨와 등을 곧게 하여 앉았으니, 바라보면 그림이나 조각상 같았다. (주석 1)
선생이 홀로 서실에 계실 때에는 가지런히 정리하고 깨끗하게 하여 책이나 물건들이 안정감있게 정돈되어 일정한 곳에 두었으며, 종일 단정히 앉아 일찍이 비스듬히 기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주석 2)
선생의 조행은 과단성 있고 확실하여 움직일 때는 규칙을 따르고, 눈으로 사특한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귓속말을 듣지 않아.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항상 가슴 속에 간직하고, 게으른 모습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주석 3)
남명은 옛날 성현의 도상을 그려 좌우에 펼쳐 두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엄숙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스승이나 어른 사이에 있는 것 같이 하니, 귀로 대면하여 명령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지냈으며, 특히 '경(敬)'자와 '의(義)'자를 크게 창이나 벽 사이에 써 붙이고 말하기를,
"우리 유학에 이 두 글자를 둔 것은 천지에 해와 달이 있는 것 같아, 만고에 통하여 바뀌지 않을 것이요, 성현의 천만 가지 말씀이, 요컨대, 그 목적이 모두 이 두 글자의 정신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던 일은 그가 얼마나 부단히 수양에 힘썼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성취를 달성하였던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주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