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않은 발목 골절로 인해 아들은 2개월가량을 집에만 있어야 했다.
김종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특히 육체적 고통이나 그로인한 불편함 등은 본인이 직접 느껴 보지 않은 이상 다른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팔다리가 부러져 기브스를 한 지인들을 간혹 보았다.
'다쳤을 때 아팠겠구나', '저 무거운 것(기브스)을 달고 다니려면 무척 불편하겠다', '몇 달을 안 씻으면 많이 가렵다고하던데…' 정도의 생각은 들었지만 깊은 공감까지는 하지 못했다. 내가 골절을 안 당해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참 많이도 넘어지고 어른이 되어서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몇 차례 당했지만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 마디로 운이 좋았다.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골절을 당해보지 않았던 관계로 고통도 모르고, 당했을 때 대처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우리와는 관계가 없거니 살아왔다. 어쩌면 쭉 그렇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우리 부부 역시 골절의 뼈아픔을 최근 공감하게 됐다. 나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다. 더 안 좋다. 6살 아들이 골절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순간의 방심으로 큰일을 겪다
탕! 요란한 소리가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주말 오후 유원지에 놀러와 벤치형 그네에 아내와 아들을 태우고 밀어주고 있었다. 제법 높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고를 반복하고 있었고 아들은 아내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발을 사방으로 휘저으며 스릴을 즐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어차피 결과론일 뿐이다.
사고는 삽시간에 발생했다. 아들의 발이 그네와 기둥 사이 공간에 들어갔고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해볼 틈도 없었다. 고통스런 아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어서 병원갈 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또래 아이들처럼 병원을 좋아하지않는 아들이 바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큰 타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아들을 안아들고 서둘러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조금만 흔들려도 자지러질 듯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던지라 아내는 혼비백산한 표정이었다. 오죽하겠는가. 아들이 모기 한 방만 물려도 너무 안타까워하는 아내인데… "너무 당황하지 말고 우선 아이부터 안심시키자" 말은 그렇게했지만 나역시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들은 타격을 받은 발목 부분에 강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붉고 파랑 멍이 제대로 든 것을 봐서 분명 가벼운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됐다. '제발 뼈에 이상만 없기를'이라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평소 종종 이용하던 어린이 병원은 이런 정도의 부상은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큰 병원으로 가라고하는데 하필 주말이라서 갈 수 있는 곳은 응급실 밖에 없었다. 전화를 해보니 그곳도 밀려 있어 한참 기다려야 할 것이다고 했다.
어찌해야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더욱이 현재 살고있는 지역은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리, 병원 등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더욱 그랬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고 있던 순간 신호대기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눈앞에 뼈전문 병원 간판이 보였다.
급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해보라했고 다행히 주말이지만 당장 진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맞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싶었다. 당시 심정은 정말 그랬다.
아들과의 2개월, 나역시 즐거웠다
뼈에는 이상이 없기를 바랐지만 이는 우리 부부의 바람일 뿐이었다. 검진결과 충격을 받은 발목 부분이 골절된 것으로 확정됐다. 아내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떨궜다. '그때 조금만 더 신경쓸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골절의 고통을 6살 어린아이가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도 들었다. 모든 부모의 당연한 심정이겠지만 '대신 내 발목이 부러졌으면…' 싶었다.
병원에서 열흘 정도를 보낸 후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돌아왔다.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다 받았고 이제는 기브스한 발목이 자연적으로 잘 붙을 수 있도록 신경써주는 일만 남았다. 누구보다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던 성향상 갑자기 달라진 상황에 힘들만도 하건만 다행히 아들은 금세 적응해줬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라 쉽게 잊혀버리나 싶었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전 '아빠… 이게 다 꿈이면 좋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이 녀석도 노력하고 있구나'는 것을 알게됐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리 부부는 뼈가 다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쪽에는 아는 것도 없고 공감도 잘 못했다. 하지만 자식이 그런 일을 겪게되자 우리가 다친 것 이상으로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들은 당분간은 걷지 못하게 된지라 예전보다 좀 더 세심한 케어가 필요한 상태였다. 맞벌이기는 했으나 아내는 반드시 회사를 나가야 되는 상황이었고 나는 재택근무가 가능했다. 그동안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내가 아들과 보내는 시간이 훌쩍 많아졌다. 아내가 그날 하루 먹을 것을 요리해 놓은 다음 출근한 이후에는 오롯이 아들과 나 둘만의 시간이었다.
뭔가 재미있게 해주고는 싶었지만 걷지 못하는 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클레이 놀이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들은 다치기 전부터도 클레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조그만 상자에 들어가는 양 정도면 며칠을 썼는데 점점 클레이에 심취해 가면서 대용량으로 구입을 하게 됐다.
그것마저도 많이 쓸 때는 2~3일이면 바닥이 났다. 2개월 동안 대용량으로만 15개 이상을 소모한 것 같다. 아들은 조그만 손으로 눈빛을 빛내며 하루에 수십 개씩 만들어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은 클레이 작품들로 가득찼다. 실력도 쑥쑥 늘었다. 텔레비전 만화에 나오는 각종 캐릭터를 삽시간에 만들어냈다.
우리가 구입하는 대용량은 전부 흰색인데 아들은 거기에 색깔 사인펜으로 색을 칠하거나 만들기 전에 색깔을 계속 도포하는 식으로 클레이 색을 변형시켜 이용한다. 일부 작품들은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인지라 아내와 나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거기에 더해 스케치북과 색연필도 꽤 많이 소모됐다. 아들이 그려달라는 것이 있으면 어설픈 솜씨나마 사인펜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거기에 아들은 색칠을 했고 내가 다시 가위로 오려서 종이인형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종이인형도 상당한 양이다. 아들과 함께 합작품을 만들어내는 재미도 상당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역시 힐링이 상당히 많이 됐다.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도 들거니와 이 녀석이 아빠를 너무 칭찬해줘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릴 때도 적지않았다. '아빠 그림 최고다', '아빠는 어쩌면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려?' 등 뭘 할때마다 칭찬 세례를 아끼지 않는다. 나이를 먹다보니 어디가서 칭찬들을 일이 별로 없는데 이제까지 못 들어본 칭찬을 아들에게서 몰아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