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일 경찰이 '3차 희망버스'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 행진을 불허한 가운데, 그날 오전 부산 영도구 봉래언덕길에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향해 손을 흔들자. 김 지도위원이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하고 있다.
유성호
2011년, '희망버스'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처음 등장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85호 크레인에서 150여 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과 조합원을 응원하기 위해 시작한 희망버스는 어느 순간부터 사회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가 지속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특히 노동문제에 거리 두기를 하던 이들의 참여가 도드라졌다. 무엇이 이들을 움직였을까? 35m 높이의 비좁은 크레인 안에서 장기간 투쟁하는 노동자와 그의 외침이 어느 노동자의 투쟁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이명박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을 때 끈질긴 노동자의 투쟁은 연대의 발걸음을 모아냈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연대의 경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85호 크레인에서 308일을 싸운 김진숙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어떠한 연대가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우리 눈으로 확인했다"며 희망버스는 '억압받는 자의 새로운 희망'이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라고 끝맺음을 했다.
함께 한 연대자들은 그의 투쟁과 발언 속에서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받는 느낌을 간직할 수 있었다. 시혜적인 연대가 아닌 평등한 연대, 소비되는 연대가 아닌 공감과 치유, 환대가 있는 연대였다. 이것이 희망버스의 힘이었다.
그 후로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24번째 희망버스가 출발했다. 노동문제에만 국한하지 않지 않고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밀양희망버스'도 있었다. 지난해 0.3평 철제 구조물 안에서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며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절규하던 유최안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를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마지막이었다.
매번 희망버스를 준비하지만 처음 같은 참여와 열기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사회적 관심과 연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은 계속되었다. 희망과 연대를 잇기 위한 실천이었다. 희망버스라는 이름은 어느새 사회적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희망버스가 출발한다는 소식만 들어도 귀를 기울이고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