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를 점령한 일제의 흔적, 지도 한 장에 모두 새겼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완도군 지도 살펴보니

등록 2024.08.23 09:42수정 2024.08.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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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때 제작된 완도군 지도에는 추자도 방향으로 장수도(빨간 원)라는 섬이 표기되어 있고, 1960년도 발행된 제주도의 행정지도에는 사수도나 장수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일제시대 때 제작된 완도군 지도에는 추자도 방향으로 장수도(빨간 원)라는 섬이 표기되어 있고, 1960년도 발행된 제주도의 행정지도에는 사수도나 장수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완도신문

국토지리정보원 국립지도박물관 고지도 자료실에는 우리나라 근·현대 지도를 모두 등록했다. 거기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완도군 지도가 있다.


1920년대 일제가 사용한 완도군의 약도인데, 지도에는 관내의 기항지와 등대 그리고 주제소, 어업조합, 해태 어업조합, 금융조합, 우편소, 법원 출장소, 사립학교, 공립보통학교, 경찰서, 도로, 군청 등 중요시설을 모두 표기했다. 완도군의 해역 경계도 정확히 표기했다.

지도상에 표기한 일제강점기 우리 지역 중요 기항지로는 노화와 소안 사이, 완도읍, 고금면이, 신지도엔 우편국이, 청산면엔 소학교, 그리고 사립학교는 군외면, 보길면, 약산면, 청산면이, 공립보통학교는 소안도, 평일도, 청산도, 경찰관 주제소는 평일도, 노화도, 소안도가 등록됐다. 물론, 중요시설은 모두 완도 본도에도 포함되어있다.

우리 지역에는 4개 지점에 등대가 설치되어 표기되어 있는 것도 큰 관심을 끈다. 어룡도 등대, 소모도 등대, 당사도 등대, 섭도 등대가 그것이다.

어룡도 등대는 전남 완도군 노화읍 어룡도길 24길에 있다. 어룡도는 목포항 남쪽으로 약 70Km 떨어졌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석유백열등으로 초점등을 밝혀 안전 항해를 담당했다고.

어룡도 등대는 1945년 전쟁으로 완전 파괴되어 기능이 중단 되었으나 해방정국에 임시복구 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현대식 설비로 복구했고, 근 100여 년 간 등대 기능을 유지했다. 지난 2005년부터 등대 무인화사업 때문에 원격장비 무인등대로 운영됐다. 등대로서의 기능 유지는 지속하고 있다고.


그 당시 이곳은 여수와 부산에서 인천이나 목포 방면으로 항해하는 5000톤급 미만 선박이 횡간수도와 마로해역을 거처 장죽수도를 통과했다.

위험물 운반선과 연안화물선의 내해수로인 이곳은 통항선박 빈도가 높다. 좁은 수로의 폭과 강한 조류 등으로 항행조건이 불리한 해역으로 인근의 섬들 주변의 수심이 낮아 위험부담이 컸다. 초기 콘크리트 타설 기법이 적용된 어룡도 등대는 하로표지 건축 발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등대로 소개되기도.


어룡도 등대가 인천이나 목포 방향에서 완도로 오는 첫 관문을 밝히는 역할이라면 소모도 등대는 우리 해역의 내항을 통과해 여수 방향으로 가는 선박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당사도 등대는 비교적 큰 선박과 부산이나 일본으로의 항해를 도왔다.

또 하나 관심을 끈 등대는 섭도(攝島)등대이다. 섭도는 평일도에 속한 섬이다. 등대가 있다고 해서 등대섬으로 부르다가 해방 이후, 섭도(攝島)라는 지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동경 127° 07′, 북위 34° 18′에 위치한다. 행정리로는 금일읍 사동리에 속하며, 본섬인 금일도와는 10km의 거리에 있다. 1971년 섭도에는 5가구 83명이 살았던 때도 있었다. 학교도 있었는데, 1957년 3월 1일에 개교하여 1992년 3월 1일에 폐교한 이 학교는 1973년에 학생의 수가 13명이었다.

우리 지역 내외 연안과 외해를 모두 점령한 일제는 곳곳에 주요지점을 정해서 호시탐탐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 이 시기 일제는 우리지역뿐만 아니라 인근의 추자도와 연계한 제주도까지 지도에 표기하며 우리나라 모든 해역을 감시했다.

그런데, 그 지도상의 완도군 최남단 해역에는 태랑도라고 불렀던 여서도가 있고 추자도 방향으로 장수도라는 섬이 분명하게 표기되었다. 제주도를 따로 분리한 지도에는 추자군도를 제주도에 포함시켰지만, 완도군의 지도에는 여서도와 장수도가 분명하게 새겨졌다. 그때 장수도의 한자는 노루장'獐'을 사용했다.

추자도 주민들이 사용하는 물 이름 사 '泗'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수도 연혁

조선시대 청산도진 본진에 속한'사수도'(蛇水島) 서울대 규장각이 재 편찬한 조선 후기 지도에 있음

1919년 7월 10일 조선총독부 임야조사 세부 측량 때 예초리 산 121번지로 확정, 예초리 김유홍(金裕洪) 명의로 등기

1930년 일본인 다나카(田中斗)가 어장 확보 차 매입 등기

1945년 조국 광복이 되자 국유지가 됨

1961년 추자초등학교 교장 박철규(朴哲奎)와 학부모회장 박병술이 흑송 1천 본을 심었고, 1962년 다시 1천 본을 심어 지상권 선점, 황금어장의 수입으로 학교 발전기금을 조성했다.

5년 후, 1967년 제주 세무서로부터 당시 금액 73,500원으로 매입 등기

1993년 제주도 교육청이 교육재산으로 이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79년 완도군이 대한민국 정부가 시행한 미도서 등록 때 장수도(障水島)로 명명, 소안면 당사리 산 26번지 지적부여 내무부 등록했다.

2005년 제주도가 완도군을 상대로 권한쟁의 심판 청구

2008년 대법원 판결, 먼저 등록된 지역 우선순위를 적용했다.

2023년 6월 제주특별자치도는 완도군이 장수도 인근 해역에 풍황계측기를 설치한 것에 권한쟁의 심판 소송을 제기해 지금 사수도 해역은 제주도와 완도군의 분쟁지역이 됐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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