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삶이 나를 더 충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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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나의 페이스메이커다. 자기다움을 꺼내고 그것을 고수했기에 대체 불가능한 밴드가 된 자우림과 라르크를 보면서, 내 서사를 써나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쓰는 삶을 늦게 시작한 만큼 다른 작가들에게 부러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이미 단단히 자리를 잡고 내가 쓰고 싶은 주제와 소재를 다루어낸 사람들을 볼 때 그렇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이 제일 슬픈 일인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지난 선택을 아쉬워 하고 조바심을 내는 시기가 한 번씩 온다. 내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결과물이 한심해 보여 사기가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내가 문학을 하고 싶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자리에 오르려고 작가를 꿈꾼 게 아니었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 있는, 일상의 언어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가슴에 쌓이는 것을 꺼내 나의 목소리를 스스로 듣고 싶었다.
음악도, 문학도, 아무리 닿으려 애써도 닿을 수 없는 것에 손을 뻗길 반복하는 일일 것이다. 다른 누가 아닌 자신이 만든 기준에 닿지 않아 괴로워 하고, 가져본 적 없는 아름다움을 막연히 그리워하고, 속속들이 보면서도 깨지 못하는 한계에 숨막혀 하는 일.
그럼에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쓰지 않는 삶보다 쓰는 삶이 나를 더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덜 불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좌우할 수 없는 결과에까지 고통받는 건 어리석다. 그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는 게 현명하고 생산적이다. 만약 나라는 사람의 서사가 누군가에게 닿아 영감이 되고 그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가 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이유도 나만의 길을 나다운 색깔로 만들어왔기 때문일 테니.
얼마 전에는 자우림의 곡 중 평소 잘 부르지 않던 '팬이야'를 혼자 불렀다. 새삼스러웠다. 2002년도에 세상에 나온 이 노랫말의 의미를 예전엔 몰랐구나. 내가 나의 팬이 되어준다는 마음이 어떤 건지 갑자기 와닿은 것이다.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요소요소의 고유함을 아끼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자유롭고 패기 있는 자기애.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무슨 일이 생겨도 변심하지 않을 팬 한 명을 얻은 기분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사람은 각자 자기 삶의 영역 안에서 독보적이다. 자신의 빛깔을 스스로 가치 없게 여기지만 않는다면 그 빛은 퇴색되지 않는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순간들로 삶을 채울 수 있길 바란다.
'해냄'이 아니라 '해나감'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길. 지나간 선택과 오지 않은 결과가 아니라 지금으로만 가득한 시간을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누릴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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