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처음이세요?" "네!" "완전 처음?" "네!!"
정유진
"엄마 축구한대!!!"
셋째가 동네방네(그래봤자 우리집의 이 방 저 방) 소리쳐서 첫째와 둘째도 와서 구경했다. 화장대 근처에서 나름 몰래 신어보고 있었는데... 일단 한 번 가보려는 것일 뿐인데... 뭔가 일이 커지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이라기보다, 등 떠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들 앞에서 축구경기를 뛰어봐? 여자인 너희들도 축구할 수 있다고 먼저 보여줘 봐? 하지만 아이의 결론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 엄마. 축구 꼭 해야 돼? 달리기도 하고 요가도 하고 축구까지 하면 어떡해? 엄마를 볼 시간이 없어지잖아." 이런 눈물나는 멘트에 미처 눈물이 생성되기도 전에 막내가 한 마디 덧붙인다. "그럼 달리기는 쉬는 게 어때?"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모험에 발을 들이민 건 '나는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때문인 걸. 정말이지 그거 하나 믿고 뛰어들었단 말이다.
"나 전부터 남자들이 너무 부러웠거든! 남편도 조기 축구를 그렇게 재밌게 다니고 아들은 뭐 클럽 축구? 요즘은 조기 축구보다 더 세련돼 보이는 그런 게 또 있대? 아무튼 그걸 재밌게 다니고. 나도 어렸을 때 편 갈라서 공으로 하는 운동 너무 좋아했단 말이야. 잘하기도 했다? 근데 여자들은 졸업하고 나면 그런 걸 할 기회가 전혀 없잖아. 그냥 집 근처에서 배드민턴 치고 헬스 가고 그러는 게 다지. 아니, 근데 나 같은 여자들도 축구를 하고 있다잖아?! 완전 놀라 버렸어! 내가 정말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좁은 세상에서 일만 하고 있었구나 싶고, 막 두근두근하더라고. 좀 말도 안 되고 웃기는 소린데, 그래 내가 이걸 그동안 그렇게 기다려 온 거였구나 싶었어."
ㅡ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235-236쪽
어느 날에 나도 '미숙 언니'처럼 축구를, 혹은 다른 무언가를 그동안 기다려 왔다고 할지 모르겠다. 삶을 되돌아보면서, 내게 있던 사건들을 주욱 엮어보면서 달리기가 아주 쓸 만한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고 말하는 날이 올지도.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 알 수 없고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더욱 탄탄히 달리기를 해나가야지. 그렇지 않니,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