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언젠가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평생의 친구를 만나겠지
pixabay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활달하던 아들이었다. 그해 겨울,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2학년 내내 가정학습을 하고 학교에 간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2년 가까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아이 사회성을 망친 범인은 바로 몹쓸 전염병이었다고 코로나19에 이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싶었다.
아니면 또 다른 용의자는 나였을까? 아이 또래의 엄마들과 어울려 무리를 만들어줘야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사실 친구나 선후배, 직장동료가 아닌 아이가 연결고리가 되는 관계에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만남 후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는 경험이 반복되니 자연스럽게 만남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사회성이 부족한 엄마일지도.
많은 부모가 아이의 사회성이 부족하고, 친구가 없는 것이 엄마의 잘못이라고 자책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는 말은 사회성뿐만 아니라 아이의 행동이나 가치관, 인격 형성에 부모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행여 아이가 부족하거나, 사회에서 인정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부모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코로나도 나도 범인이 아니다. 아이는 그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아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그나마 몇 없는 친구들과도 모두 다른 반이 되고, 반에 친한 친구가 없어 조금 힘들다고 했다. 이미 형성된 친구들 무리엔 끼어들기가 힘들다고. 천천히 다가가는 중이라고.
그렇다고 학교 생활이 외롭고 힘든 건 아니라고 했다. 지적 호기심이 강한 아들은 다행히 학교 수업을 통해 욕구를 충족하고 즐거움을 느낀다. 너무 힘들면 선생님과 내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내 불안을 눈치챈 것일까? 아이는 말했다.
"엄마, 나 아싸 아니야! 그럴싸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럴싸? 그럴싸는 시쳇말로 인싸(insider)도 아싸(outsider)도 아닌 그 중간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심각한 상황에서 그럴싸한 단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운동도, 공부도 잘하고 무리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누구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건넛집 엄친아를 곁눈질하며 우리 아이도 인싸이길 바라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 나도 학창 시절에 그렇게 살지 못했으면서 아이는 그러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자 모순이다.
아이는 나의 우려와는 달리 옆 반의 친한 친구와 함께 밥을 먹고, 신나게 체험학습을 마쳤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수다를 떠는 대신 넓은 좌석에 여유롭게 앉아 창밖의 풍경을 응시했을 것이다.
베어버리지 않은 벚꽃나무처럼
처음 집을 짓고 마당에 심었던 벚나무는 몇 년간 꽃이 피지 않았다. 벚꽃이 피지 않는 벚나무라니. 어린 나무일 때 뿌리를 내리느라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병충해로 나무에서 이상한 진이 흘러나온 적도 있었다.
농약사에 물어보니 다른 식물에 전염될 수 있으니 베어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비록 상태가 시원찮아도 살아있는 것이 분명한데 강제로 베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잔가지들을 짧게 치고 약을 사와 몇 차례에 걸쳐 뿌렸다.
나무는 이듬해에도 꽃이 피지 않고 잎만 무성했다. 평소처럼 물을 주었고 벚나무가 내어주는 그늘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