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년 기념관(왼쪽), 이강년 의진의 전투 장소 중 한 곳인 문경 새재
정만진
경북 문경 영순면 이목리 381번지 본적의 강병수(姜炳修) 지사는 1972년 9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였다. 1885년 9월 5일 출생했으니 나라가 망해가던 시대를 그는 20대로 살았다. 22세이던 1907년 이강년 의진에 들어 일본군과 싸웠다.
이강년은 22세이던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4년 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정치에 실망해 벼슬을 버렸다. 10년 뒤(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에 투신했다. 이때 동학 장수 이강년을 따랐던 농민군들이 뒷날 의병을 자원해 창의대장 이강년에 큰 도움을 주었다.
농민들, 동학군 활동했던 이강년 적극 지원
이강년이 문경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킨 때는 1896년이었다. 그는 왜적 앞잡이 노릇을 하며 양민 토색을 일삼던 관찰사 김석중, 순검 이호윤과 김인담을 농암 장터에서 효수하는 것으로 창의 출범식을 치렀다. 백성들은 이른바 열화 같은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 무렵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을미의병은 고종의 해산 명령에 따라 스스로 군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국왕이 의병 해산을 명하게 되자, 여기에 항거할 명분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군(인용자 주: 서울 중앙군)이 각지로 파견되어 의진을 압박한 까닭에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해졌기 때문이다.
고종의 명령에 따라 해산되고 만 을미의병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저항해 을미의병을 창의했다가 자진 해산한 이강년은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사태가 터지자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강병수가 이강년 의진에 들어 종사(從事)로 참전한 것은 이때였다.
<운강선생 창의 일록>에 "강병수의 호는 신암(信庵)이며 문경에서 살았다.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퇴각하는 중에도 잠시도 (이강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의 헌신도 보람 없이 이강년 의병장은 1908년 일제에 피체되어 순국했다. 그 이후 강병수는 고향에서 은둔했다.
이강년 의병장 순국 후 고향에서 은둔
문경 강병수 지사 출생보다 1년 전인 1884년, 인근 고을 상주에서 또 다른 강병수(姜秉秀, 秉洙, 炳洙) 지사가 태어났다. 한자이름이 여럿인 것은 본명이 아니라 그들이 이명(異名)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본명은 강순필(姜順必)이다.
상주 강병수(강순필) 지사도 이강년 의진에 들어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이강년 의진군 해산 몇 년 뒤(1913년) 경북 영주에서 결성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에 다시 가담했다. 대부분 의병 성향 인물들로 구성된 풍기광복단은 독립운동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인 소유 영월 중석광산을 습격하고,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 활동을 펼쳤다.
이강년 의진 해산 후 풍기광복단 활동
그러던 중 1915년 8월 25일 대구 중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등과 통합해 광복회(光復會)로 발전했다.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광복회는 국내에서 모집한 군자금으로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세워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도 기지를 확보해 두었다가 때가 오면 봉기해 독립을 쟁취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비밀·폭동·암살·명령"을 4대 강령으로 한 광복회는 수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 중 한 가지가 1917년 11월 10일 "세인을 놀라게 한 대구 부호 전 관찰사 장승원 사살(박성수,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이었다. 하지만 1918년 1월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2월 총사령 박상진 등이 피체되면서 광복회는 마침내 해체되었고, 장승원을 사살한 강순필은 1921년 사형으로 순국했다(3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