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김윤덕 지사가 주도한 1919년 3월 10일 남문외시장 만세시위 현장인 대구 중구 남산동 관덕정 일대의 모습, 김윤덕 지사 판결문(1919.4.18. 대구지방법원)
정만진, 국가보훈부
김윤덕(金潤德) 지사는 1952년 9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1888년 11월 19일 대구에서 태어났으니 향년 64세였다. 1919년 3월 10일 대구 남문외시장(새장 또는 덕산동 시장)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대구의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날은 3월 8일이었다. 이날은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히는 대구 서문시장 장날이었다.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교사들, 그리고 남산교회 성직자들 중심의 교남YMVA 지도부와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고보, 성경학교 학생들이 주도했다.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에 이어 2차 시위 도모
이튿날(3월 9일) 오후 3시 무렵,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학생들을 비롯한 150여 명의 시위대가 2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달성공원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전날(3월 8일) 서문시장 시위 후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던 일본 군경에 의해 강제로 해산을 당했다.
한약상을 운영하던 김윤덕 등 지방유지들 중심으로 다시 만세 시위가 기획되었다. 날짜는 그 다음날인 3월 10일, 장소는 남문외시장(현재의 중구 남산동 관덕정 일원)으로 정했다. 3월 8일이 서문시장 장날이었듯 3월 10일도 장날이었다.
3월 10일 시위도 장날에 맞춰 벌이기로 계획
김윤덕을 비롯한 유지들과 학생들은 9일 하루 내내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만세시위를 벌일 날이 바로 내일이었으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이윽고 3월 10일 4시30분쯤, 시장에 인파가 가장 많이 모인 때를 기다려 학생들이 태극기를 높이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틀 전 서문시장에서 달성군청(현재의 동성로 대구백화점 자리)까지 이어진 시위 행진에 혼이 났던 일본 군경의 감시와 통제는 철저했다. 장터에 모인 수백 명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지만 시가지로 진출할 수는 없었다. 사방을 에워싼 일본군경의 총칼에 가로막힌 탓이었다.
김윤덕을 비롯한 주도자들은 일본 군경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은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그에게 징역 6월을 언도했고, 5월 18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도 같았다. 김 지사는 6개월 동안 고문과 감옥살이의 고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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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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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동안 계속 벌인 경북 의성 대사동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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