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정, 이효정 평전 성격의 글이 140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는 <친일과 항일 사이(전점석 저)> 표지, 고승하가 곡을 붙인 <멈추어라(이효정 시)> 악보
전점석
1981년 경상남도 주최‧마산시 주관 노인시조백일장에서 68세 할머니가 장원을 차지했다. 그녀는 딸네 집에 머물며 외손자를 돌보는 사이사이 마산노인대학 글쓰기 강좌 수강을 했는데, 그 보람이 보사부장관상 수상으로 나타났다. 장원상 수상 시조의 제목은 '신록'.
청신한 새푸름을 한아름 휘어잡아
해맑은 내 안에다 깊숙이 심어놓고
백발의 허허로움을 달래볼까 하노라
할머니는 그날 이후 마산문인협회 주관 월례 낭송회에 꾸준히 참석했고, 이윽고 76세이던 1989년 첫 시집 <회상>, 82세이던 1995년 제2시집 <여든을 살면서>를 펴냈다. 다음은 '꽃을 보는 마음' 전문이다.
꽃을 보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꽃을 보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가다가 길이 막혀도
기다림에 목줄이 타버려도
꽃을 보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웃는 내 모습 외면당해도
힘껏 외침에 메아리 없어도
꽃을 보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아! 꽃을 보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2006년 광복 기념식
2006년 할머니 시인을 알고 지내온 사람들 대부분을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93세 할머니 시인이 그해 8월 15일 광복 61주년 기념식에서 '최고령 생존 지사'로서 건국포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13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이효정(李孝貞) 지사였다.
그때까지 "초라한 빌라의 작은 방 한 칸에서 돋보기로 책과 신문을 읽으며 흐린 기억을 추스르는" 할머니 시인이 젊을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문과 투옥을 겪은 애국지사 이효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전점석 《친일과 항일 사이》).
10대 때 노동운동에 투신, 옥고를 치렀다
이효정 지사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현 동덕여고)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만세를 불러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고,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국가보훈부 공훈록)."
이 지사는 졸업 후인 1935년 11월, 서울에서 이재유·권우성 등이 주도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해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12월 28일 출소한 이효정은 그로부터 4개월 뒤 역시 독립운동가인 박두복과 결혼했다. 이때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부부는 울산 바닷가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토록 소망했던 독립을 맞았지만 그 기쁨은 뜻밖에도 젊은 부부를 불행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독립 후 다른 길을 선택한 젊은 부부
남로당원이던 박두복은 미군정에 의해 남로당이 불법화된 1946년 초 서울로 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남편을 찾기도 할 겸 이효정은 가까운 친척들이 사는 대구로 이주했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간신문 교열기자로 일했다.
좌익 검거 실적에 열을 올리던 경찰이 "한밤중에 집으로 들이닥쳐 (중략) 강제로 연행할 때 어린 딸이 울면서 매달리자 뺨을 때리고 발로 차서 다치게 했다. 이효정도 경찰 취조 중에 고문을 당했다. (중략) 손목이 부러지는 등 일제강점기보다 더 심했다(전점석 《친일과 항일 사이》)."
이효정은 "모든 가족이 있는 남쪽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지만 박두복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중 전쟁으로 감옥이 무너지자 ("사랑하던 아내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월북했다.
말 한 마디 없이 월북한 남편
"말 한 마디 없이 떠난 남편이 남겨 준 유산은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뿐"이었다. 수시로 찾아오는 경찰들 때문에 정규직은 할 수 없었고, 보모 노릇, 호떡 장사, 계란 장사, 우유 배달, 야채 장사, "심지어 전염병을 우려해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방역일" 등으로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경찰과 정보부원들의 협박과 가난 때문에 큰아들 박진수는 다른 학생들에게 뭇매를 맞기 일쑤였고, 결국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어린 나이에 노동을 시작했다.
장남은 초등학교 중퇴하고 노동일 시작
게다가 1967년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이효정에게 들려왔다. 남편이 남파되었다가 북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지금보다도 더 심하게 "온가족이 간첩 집안으로 찍혀 끔찍한 세월"을 보내야 했고, 막내시동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도 이효정은 젊은 시절 스스로에게 맹세한 "마음의 약속"을 지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았다. 한없이 힘겨웠지만 꿋꿋하게 살았고, 노년에 시인도 되었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 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시 '약속' 전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마음의 약속"을 한없이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삶의 자세를 유지하게 해주었을까? 민족시인 이육사가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이었고, 고모 이병희는 북경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데 주목해본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효정의 증조할아버지 이규락은 항일 의병장이었고, 할아버지들인 이동걸·이동하·이경식과 아버지 이병룡과 삼촌 이병린·이병기, 고모 이병희가 모두 독립지사였다. 그 중에서도 이동하·이경식·이병린·이병희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고통의 시대를 살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고문과 죽음을 감수하고, 자기 자신에게 한 "마음의 약속"을 굳게 지킨 사람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전점석 저서 《친일과 항일 사이》를 통해 알게 된 이효정 지사의 슬프고도 강인한 삶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가풍이 아닐까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고승하 음악가가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진 이효정 시인의 '멈추어라' 전문을 읽어본다.
삶을 저미는 아픔이 가물탄 눈물을 짜내고
외치고 싶은 목마름 목이 잠긴다
그만 쏘아라 그만 던져라 한피 흐르는 우리가 아니냐
처절한 짐승의 몰골이다 증오와 분노의 불길이 솟는다
발길에 차이며 짐승처럼 질질 끌려가는 학생들
뉘를 살리고 뉘를 죽이려는 것이냐
제발 멈춰라 모두의 바람이다 한피 흐르는 우리가 아니냐
처참한 짐승의 몰골이다 증오와 분노의 불길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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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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