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024년 8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김남주 시인 30주기 행사 <2024, 지금 김남주> 현장 스케치
이효영
30주기를 앞두고 김남주를 기리는 행사의 스태프로 잠시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김남주를 알아가는 게 도리라 생각해 그의 전집을 읽기도 하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기도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서로 취향이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김남주를 좋은 사람이라 증언하며 30주기를 준비하는 데에 기꺼이 힘을 보탰다는 점이다.
그중 내가 평소 '내 어른 친구'라 표현했던 K 시인도 있었다. 그 또한 나보다 한참 윗세대이다. 그가 오랜 시간 세간의 존경을 받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나는 10년 전에 처음 알았다.
나는 문학청년이 아니었고, 소설 전공으로 뒤늦게 입학한 문창과에서 처음 시를 공부했다. 또한 운 좋게도, 내공도 없는 주제에 등단이 빨랐다.
이렇게 뭣도 모르는 내가 K 시인과 친하게 지낸다는 소리를 했더니, 초면인 운동권 선배가, 나를 아주 재수 없는, 그러니까 자신이 이렇게 권력자 친구가 있다는 걸 자랑하는, 약은 인간이라 하는 게 아닌가?
황당한 말이었고 엄연한 매도였으나, 앞으론 함부로 누구와 친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 정도는 얻었다.
그러니까 김남주도, K 시인도, 감히 어린 것들이 언급해서는 안 되는 전설의 레전드였다는 걸, 무식한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실은 나는 전설이든 나라님이든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는 친구를 할 수가 없으며 그렇기에 권력자든 아니든 간에 친구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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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내가 김남주란 사람에 매력을 느끼는데, 그에 대해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하거나 호의를 표하기 어려운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의 특수하고 특이한 성정이나 행동 방식에 큰 흥미를 느끼고 결국 호의를 갖게 됐다. 그런데 죽음은 사람을 신으로 만드는지, 살아있다면 친해졌을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해서도 친근히 말하는 게 눈치 보인다. 나는 그게 좀 답답했다. 나는 그들의 공적인 업적을 존경하는 만큼, 반대로 실생활에선 어느 정도 어리숙하고 괴짜인 사람들을 사랑한다.
한편으로 나는 친구가 마냥 편치만은 않다. 친구가 어렵기에 그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알아도 알아도, 사람에겐 새로운 면모가 생기며, 그걸 알아야 내가 조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배려하지 않으면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그건 나이와 성별을 떠나서 모든 관계가 똑같이 그러하다.
김남주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마음이며 감정이다.
만나지 못했기에 위인으로 우상화하지 못하지만, 그의 작품이나 기록은 남아 있다.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호의와 동경은 품을 수 있다. 내겐 그에 대한 미화가 없다. 그렇기에 더 호기심을 갖고 호의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멀찍이 떨어진 자의 장점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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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 대한 궁금증처럼, 나는 세상을 떠나 우리의 곁에 없는 사람들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지금 그 사람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말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남주에 대해 상상할 때, 그는 변함없이 다정하고 정의롭다. 그래서 서로 의견이나 작풍이 안 맞는 사람들도 입을 모아 그의 인품을 칭송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끝끝내 훌륭해서 저런 사람하곤 마음을 터놓고 싶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생전의 행보로 미루어 보았을 땐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살아 계신다면 '꼰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아직 아름다울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본다. 나는 무럭무럭 늙어가고 시시각각 꼰대가 되어 가는데, 그는 그대로 아름다울 권리가 있다. 나는 내 친구뿐 아니라 친구가 될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들도 존경하는 김남주에게 어떤 희망을 본다.
떠나간 분들이 가지는 특권은 무조건적인 신격화가 아니라, 이와 같은 희망의 가능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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