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생물학적 유해요인이라는 새로운 기준 마련의 첫 번째 장을 열다

노동환경에서의 생물학적 유해요인에 관한 ILO 협약 ①

등록 2024.10.10 16:35수정 2024.10.10 16:35
0
'생물학적 유해요인', 새로운 ILO 기준의 설정

통제되지 않은 생물학적 유해요인(biological hazards)1)이 전 세계 산업 및 공중보건 환경에 미칠 수 있는 막대한 영향을 보여주었고, 노동자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인 2022년 3월, ILO 이사회는 작업 환경의 생물학적 유해요인에 관한 기준을 개발하도록 결정했다.

2022년 6월 ILO는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기존 4개에 더해 기본권으로 정했다. 그리고 협약 제155호(산업안전보건과 작업환경)와 제187호(산업안전보건 증진체계) 협약을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으로 선정했다. ILO 기본 협약은 기존 협약 8개에2) 더해서 10개로 늘어났다. 한국은 이미 2008년에 155호와 187호 기본 협약을 비준한 바 있다.

매년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전 세계 약 300만 명의 노동자,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은 언제 어디서든 노동자들이 정보가 없는 질병이나 바이러스 감염에 걸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고조시켰고, ILO에서 기준 마련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2024~2025년 2년에 걸쳐 완성될 이 기준은 2024년 6월, 2주간 각국 정부, 노동자그룹, 사용자그룹의 첫해 토론으로 어느 정도 내용이 갖추어졌다.

필자는 민주노총의 노동자 대표단의 일원으로 ILO 총회 기준설정위원회에 참가했다.3) 기준설정위원회는 ILO 총회의 위원회 중 하나로 새로운 기준을 만든다. 노동자 그룹과 사용자그룹은 집단이 하나의 의견을 제출하고 각 대표가 발언권을 갖는다. 정부, 그리고 정부집단(유럽연합, 아프리칸 국가, 걸프만 국가, 중남미(GRULAC) 등)은 각자가 발언권을 갖는다.

ILO 사무국의 초안을 바탕으로 각 그룹, 정부가 제출한 조항별 수정안은 토론을 통해 채택되기도 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스스로 철회하기도 한다. 조항 하나하나를 '만장일치'로 결정하기에 각 그룹이 다른 그룹,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끝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투표로 결론 낼 수 있음에도 한 번도 투표하지 않았는데, 토론을 거쳐 만장일치로 합의한다는 원칙을 깨는 일을 하는 게 부담이 크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여러 그룹과 국가들, 정부 집단들은 매일 회의를 통해 기준설정위원회에 제출할 수정안을 마련했다. 노동자그룹은 때로 노동자 건강권 확대를 위해 타협하지 않을 내용을 제출하기도 하지만, 정부 측의 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 내용에 대해서는 보류 상태로 둔 뒤 플랜 B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번 회의에서 정부들은 무엇보다 노동자 건강, 생명을 위한 새로운 기준을 수립하기 위해 모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노동자그룹과 함께 보호 범위, 권리 보장을 더 확대하려고 했다.


기준설정위원회 주요 쟁점4)

노동자들은 병원과 실험실, 하수 정비 시설이나 폐기물 수거 등 노동 현장에서 박테리아, 바이러스, 기생충, 곰팡이, 미생물 같은 수많은 생물학적 유해요인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노동환경에 생물학적 유해요인이 미치는 영향에 관한 정확한 데이터가 부족했다. ILO의 의뢰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2021년 전염성 및 비전염성 생물학적 위험에 대한 업무상 노출로 인한 사망자는 5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전체 업무 관련 사망자 추정치의 9.8%에 해당하는 수치다.5) 다양한 유해요인, 대인 접촉을 통한 감염 가능성, 생물학적 유해 물질을 운송하다가 감염될 위험 등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토론이 치열하게 이뤄졌다.


초반부터 이 기준의 형태를 협약, 권고, 권고로 보완한 협약 중 어떤 것으로 정할지 논쟁했다. 노동자그룹과 대다수 정부가 '권고로 보완한 협약'을 지지했고 일부 정부와 사용자그룹만이 '권고' 형태를 지지했다.

사용자그룹은 산업안전보건 협약의 비준 가능성이 낮고 소규모 사업장의 부담을 이유로 들며 권고 채택을 주장했지만, 결국 권고로 보완된 협약으로 채택되었다. 회의를 다섯 시간 지속한 후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결국 다음날에야 권고로 보완한 협약으로 결정되었다. 이 기준은 내년에 완성되겠지만, 일단 '협약' 지위를 얻었다. 많은 이들이 환호한 순간이었다.

이어서 생물학적 유해요인 정의에는 동식물 또는 사람의 유기 물질, 체액, 생물학적 매개체 또는 질병의 전염원에 대한 노출이 포함되었고, 적용 범위는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정했다. '건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도 주요 토론 거리였다. 국가 정책 영역에서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과 일반적 웰빙을 고려해 정책 마련하도록 하는 수정안이 채택되어 노동자 건강의 정의를 확대했다. 또한 온열 질환, 야외 노동자들의 각종 질병 등 예측하기 어려운 기후 및 환경 위험이 안전보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그것들을 예방 범위에 포함하고 관련 정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a  2024 제112차 국제노동기구(ILO) 총회 기준설정위원회 생물학적유해요인 회의 모습.

2024 제112차 국제노동기구(ILO) 총회 기준설정위원회 생물학적유해요인 회의 모습. ⓒ ILO


젠더는 뜨거운 주제였다. 사업주의 의무와 책임에서 노동환경의 생물학적 유해요인과 관련해 예방 및 보호조치를 함에 있어 성인지적 관점을 보장하도록 한 노동자그룹의 수정안이 정부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채택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직업병 데이터 수집 중 생물학적 유해요인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직업병, 산업재해 등에 대해 젠더에 따른 연간 통계를 발표한다는 문구를 넣을 순 없었다. 중동과 아프리카 정부들이 격렬한 반대를 했기 때문인데, 이번 회의에서는 젠더가 아닌 섹스(sex)를 넣는 것으로 합의한 데 만족해야 했다(다만, 내년에 재논의하도록 기록해둔 상태다).

사용자의 의무와 책임에서 노동환경의 생물학적 유해요인과 예방 및 보호조치에 대한 정보, 지침 및 교육을 정기적으로 유급 근무 시간, 되도록 평소 근무시간 중에 제공하도록 했다. 노동자들에게 필수적으로 제공되어야 할 교육이 노동시간 외 시간에 이루어지거나 무급으로 제공되어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다.

위험을 평가할 정보가 충분치 않은 경우, 사전 예방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코로나19처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유해요인과 위험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필요한 정보가 없을 때도 예방조치를 취해 노동자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게 했다. 그리고 작업중지권과 관련해선 초안에 담긴 내용에 더해, 급박하고 심각한 위험이 제거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업무에 복귀하지 않고, 사용자가 시정 조치를 취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으로 수정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완전히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이후에 업무에 복귀할 권리를 단단히 했다.

한국의 과제

생물학적 유해요인과 관련한 규정은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산업안전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 감염병 예방 및 관리법 등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유사한 내용일지라도 정확하게 생물학적 유해요인으로 정의되지 않은 부분도 있어 포괄에 어려움이 있다. 그간 생물학적 유해요인이 노동 현장의 질병 유발 요인으로 뚜렷하게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학물질처럼 질병 유발 가능성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현 법규정에 생물학적 유해요인을 별도로 규율할 필요가 있다.

현 법제도 하에서는 생물학적 유해요인으로부터 보호할 업종이 주로 의료 부문이나 실험실 등으로 좁게 포함되어 있는데 농업, 폐기물 관리, 청소 및 유지보수, 인도주의 활동, 돌봄, 도축업 등 조치 및 보호 업종을 확대해야 한다. 정확히 생물학적 유해요인이라는 명칭을 쓰고, 위험성평가 대상, 안전보건 교육 내용에 포함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직업병 목록에 포함하는 것, 이 유해요인으로 인해 업무를 할 수 없을 때 소득을 보장하는 일 역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2025년에는 새로운 생물학적 유해요인에 관한 기준이 권고로 보완한 협약 지위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그 후 정부는 새로운 협약을 비준하고 국내법 역시 협약에 맞춰 개정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때 정부는 노동자의 참여와 열린 대화를 통해 제도를 마련하고 노동자 건강권을 폭넓게 보장해야 할 것이다.

1) hazard(유해요인)는 물질의 고유한 속성 때문에 발생할 위험, 위험요소를 뜻하고, risk(위험)은 위험요소가 어떤 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을 말한다. Biological hazards는 생물학적 유해요인으로, risk는 위험으로 번역했다.

2) ILO 기본 협약은 강제노동(제29호), 강제노동 금지(제105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제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제98호), 동등 보수(제100호), 고용과 직업에 있어서 차별(제111호), 취업 최저 연령(제138호),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철폐(제182호)이다. 한국은 이중 강제노동 금지(제105호) 협약을 제외한 7개 협약을 비준했다.

3) ILO 총회에는 기준적용위원회(협약, 권고 이행 감시, 감독), 주기토의위원회(일터에서의 기본 원칙과 권리 전략 목표), 일반토의위원회(양질의 일자리와 돌봄 경제), 일반사항위원회(협약 및 권고 폐기), 재정위원회(사업계획 및 예산) 등도 함께 진행된다.

4) 채택된 결론문(안)과 자세한 내용은 ILO 홈페이지 참고.

5) Jukka Takala et al., Global Estimates on Biological Risks. 아직 발표되지 않은 연구 내용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0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유청희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ILO #생물학적유해요인 #국제협약
댓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2. 2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3. 3 늙음은 자전거 타는 친구가 줄어들고, 저녁 자리에도 술이 없다는 것 늙음은 자전거 타는 친구가 줄어들고, 저녁 자리에도 술이 없다는 것
  4. 4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5. 5 대법원에서 '라임 술접대 검사 무죄' 뒤집혔다  대법원에서 '라임 술접대 검사 무죄' 뒤집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