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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노동자, 건설현장의 문을 두드리다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3-1] 작지만 깊은 발자국

등록 2024.10.22 10:26수정 2024.10.2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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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기자말]

 ▲내 업무는 매일 현장마다 올라오는 건설자료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내 업무는 매일 현장마다 올라오는 건설자료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popnzebra on Unsplash

30대의 나는 남보다 유난히 작은 발로 노동운동이라는 초행길에 올랐다. 다시 마주하지 않을 것 같았던 직장 내 괴롭힘을 또 맞닥뜨린 후, 공황장애라는 병명을 업은 채 '이 길이 맞는가?'라는 지난한 갈림길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자신을 다독이는 것도 잠시, 급기야 공황발작으로 구급차를 타는 사고를 겪자 '이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나?'라는 의문이 더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빈말로도 안정적이라 할 수 없던 성장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버텨내 온 저력이라면, 지금의 나에게도 반환점이 될 수 있을까 싶어 기억을 살려본다.

16세의 길었던 겨울

내가 자란 도시는 16세가 되면 입시로 고등학교가 정해진다. 학교의 이름이 결정되는 만큼 성장통도 심하게 겪는 시기였고, 마치 겨울을 두 번 맞는 것처럼 매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때는 인생 최악의 시기라 꼽을 만큼 모든 것이 불안했다. 원룸 꼭대기 층에 살다 불법개조를 원상으로 복구하라는 행정처분으로 집이 헐리는 사건을 겪고, 살 곳을 잃어 임시로 아버지의 사무실에 스티로폼을 깔고 잠을 청하는 형편이었다. 그도 모자라 모텔을 전전하기까지 하니 자연히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치였고, 부모님과의 거리는 멀기만 했다.

가정에도 기댈 곳은 없었고, 따돌림으로 촉발된 지옥과도 같은 학교생활을 졸업까지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점점 '자퇴'라는 카드를 생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연일 학교폭력 뉴스로 떠들썩했기에 '신고하고 자퇴하자!'라는 결심이 강했고, 그 전에 마지막으로 담임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정하려고 면담을 요청했다. 별 차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어른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와 변화의 약속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이후 선생님은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학급의 동기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어도 내게는 학교 안에서 믿을 수 있는 어른이었기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면담 이후 생활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전의 가해자들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별도로 꾸려진 임시 학급에서 안정을 찾자, 또래와 같이 일상을 보내는 날도 생겼고, 잠시나마 평범한 날이 있다는 것이 어색하고 기뻤다. 그러자 모두가 걱정했던 성적도 빠르게 고입 합격권으로 들어왔다. '이제 시내 인문계도 문제없다!'라는 말을 듣던 날, 드디어 멀쩡한 딸 노릇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숨죽여 울었다. 덤으로 학교에 상담하러 온 부모님이 웃으며 나가는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해, 긴 고비 끝에 받아 든 졸업장 속에는 '끝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 주어서 고마웠다'라는 편지가 함께 끼워져 있었다. 몇 번이고 글자를 눈에 새기다 끝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해가 바뀌자, 꿈에 그리던 고등학교 합격증을 받으며 그동안의 설움을 다 털어내려는 듯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나는 그렇게 길었던 겨울에 마침표를 찍었다.


'결혼'을 지우다

또래들이 "OO이와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할 거야!"라고 이야기하며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부터, 나는 자신과 결혼이라는 단어를 연관 짓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무서운 존재였고, 다른 가정의 아버지와 딸처럼 친밀한 관계라는 건 내게는 너무 어색한 이야기였다.


구김이 많은 집안을 대표하는 소리는 살림살이가 깨지는 소리였다. 드세기 그지없는 시가까지 챙기는 어머니의 의지가 되어야 할 아버지는 저녁 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기 일쑤였고, 간혹 집안을 뒤흔드는 고함과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는 어린 나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물건을 치우고 있는 어머니를 볼 때 '이럴 거면 왜 같이 사는 거야?'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청소년이 되자 깨진 물건을 치우는 사람은 나였다. 하나하나 치우며 깨어진 감정도, 정상적인 가정에 대한 동경도 함께 버렸다.

성인이 되어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스무 살도 훌쩍 넘은 딸에게 의자를 휘둘러 코뼈가 휘어지는 가정폭력이 벌어졌음에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내 삶 속에서 '결혼'을 지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사람 만나면 달라질 거야'라는 설익은 위로를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정이 주는 안온함을 별로 느껴보지 못했던 내게는 온전한 가정을 구성하고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다.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고,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지나가며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뒤늦게나마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픽사베이

건설현장의 비정규직 노동자

울퉁불퉁한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이라는 문을 간신히 연 내 앞에는 학비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등록금이야 대출을 사용해서 버텼지만, 생활비는 그럴 수 없었다. 물값이라도 아끼려 학교 정수기에서 물을 길어 마시고, 학생식당의 가장 싼 메뉴를 선택해도 생활비는 늘 모자랐다. 거기다 공무원 시험 준비에 실패해 공부의 목적을 잃은 상태였다. 학교 고시반에서는 더 있을 수 없어 그만두었고, 답답한 마음은 점점 학교생활과도 멀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학교생활을 이어가는 게 맞나?' 싶어 한참 방황 중이던 때, 이모님이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잠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 왔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인천 바닷가, 그것도 건설현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낯설기 그지없었지만, '목적 없는 공무원 시험에서 벗어나 직접 학비를 벌며 식견을 높일 기회'라는 말에 짐을 싸 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내 업무는 매일 현장마다 올라오는 건설자료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남성이 절대다수였던 분위기에서 "여자니까 얼마 못 버틸 거다"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무거운 자료들을 더 나르고,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내 힘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알아가야겠다 싶어 아침체조로 시작하는 건설현장만의 문화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마이크를 잡고 안전구호를 적극적으로 외치기도 하고, 거친 음주문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 노력했다. 그러자 본부에서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동료들의 기억에 남았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근무하더라도 돌아갈 날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내 급여통장에 말없이 쌓인 숫자를 보며 '드디어 돈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확신에 들뜨기도 했다.

옷깃을 찢어낼 듯 불어대는 현장의 바닷바람은 거칠었지만, 비정규직이라 하여 더 아프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족쇄를 끊고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활로를 열어주었다. 또한 '이 큰 현장에서도 잘 지내고 돌아왔으니 못할 건 없다!'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복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연재3-2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민주일반노동조합연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공공운수노조 #민주일반연맹 #여성노동자 #생애사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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