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업무는 매일 현장마다 올라오는 건설자료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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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나는 남보다 유난히 작은 발로 노동운동이라는 초행길에 올랐다. 다시 마주하지 않을 것 같았던 직장 내 괴롭힘을 또 맞닥뜨린 후, 공황장애라는 병명을 업은 채 '이 길이 맞는가?'라는 지난한 갈림길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자신을 다독이는 것도 잠시, 급기야 공황발작으로 구급차를 타는 사고를 겪자 '이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나?'라는 의문이 더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빈말로도 안정적이라 할 수 없던 성장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버텨내 온 저력이라면, 지금의 나에게도 반환점이 될 수 있을까 싶어 기억을 살려본다.
16세의 길었던 겨울
내가 자란 도시는 16세가 되면 입시로 고등학교가 정해진다. 학교의 이름이 결정되는 만큼 성장통도 심하게 겪는 시기였고, 마치 겨울을 두 번 맞는 것처럼 매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때는 인생 최악의 시기라 꼽을 만큼 모든 것이 불안했다. 원룸 꼭대기 층에 살다 불법개조를 원상으로 복구하라는 행정처분으로 집이 헐리는 사건을 겪고, 살 곳을 잃어 임시로 아버지의 사무실에 스티로폼을 깔고 잠을 청하는 형편이었다. 그도 모자라 모텔을 전전하기까지 하니 자연히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치였고, 부모님과의 거리는 멀기만 했다.
가정에도 기댈 곳은 없었고, 따돌림으로 촉발된 지옥과도 같은 학교생활을 졸업까지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점점 '자퇴'라는 카드를 생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연일 학교폭력 뉴스로 떠들썩했기에 '신고하고 자퇴하자!'라는 결심이 강했고, 그 전에 마지막으로 담임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정하려고 면담을 요청했다. 별 차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어른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와 변화의 약속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이후 선생님은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학급의 동기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어도 내게는 학교 안에서 믿을 수 있는 어른이었기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면담 이후 생활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전의 가해자들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별도로 꾸려진 임시 학급에서 안정을 찾자, 또래와 같이 일상을 보내는 날도 생겼고, 잠시나마 평범한 날이 있다는 것이 어색하고 기뻤다. 그러자 모두가 걱정했던 성적도 빠르게 고입 합격권으로 들어왔다. '이제 시내 인문계도 문제없다!'라는 말을 듣던 날, 드디어 멀쩡한 딸 노릇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숨죽여 울었다. 덤으로 학교에 상담하러 온 부모님이 웃으며 나가는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해, 긴 고비 끝에 받아 든 졸업장 속에는 '끝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 주어서 고마웠다'라는 편지가 함께 끼워져 있었다. 몇 번이고 글자를 눈에 새기다 끝내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해가 바뀌자, 꿈에 그리던 고등학교 합격증을 받으며 그동안의 설움을 다 털어내려는 듯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나는 그렇게 길었던 겨울에 마침표를 찍었다.
'결혼'을 지우다
또래들이 "OO이와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할 거야!"라고 이야기하며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부터, 나는 자신과 결혼이라는 단어를 연관 짓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무서운 존재였고, 다른 가정의 아버지와 딸처럼 친밀한 관계라는 건 내게는 너무 어색한 이야기였다.
구김이 많은 집안을 대표하는 소리는 살림살이가 깨지는 소리였다. 드세기 그지없는 시가까지 챙기는 어머니의 의지가 되어야 할 아버지는 저녁 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기 일쑤였고, 간혹 집안을 뒤흔드는 고함과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는 어린 나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물건을 치우고 있는 어머니를 볼 때 '이럴 거면 왜 같이 사는 거야?'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청소년이 되자 깨진 물건을 치우는 사람은 나였다. 하나하나 치우며 깨어진 감정도, 정상적인 가정에 대한 동경도 함께 버렸다.
성인이 되어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스무 살도 훌쩍 넘은 딸에게 의자를 휘둘러 코뼈가 휘어지는 가정폭력이 벌어졌음에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내 삶 속에서 '결혼'을 지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사람 만나면 달라질 거야'라는 설익은 위로를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정이 주는 안온함을 별로 느껴보지 못했던 내게는 온전한 가정을 구성하고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다.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고,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지나가며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뒤늦게나마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