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이탄광 갱구 앞을 바라보던 전석호(92)씨가 1942년 2월 3일 이곳에서 숨진 어버지를 생각하며 연신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다.
조정훈
"아버지 저 왔습니다."
휠체어에 겨우 몸을 기댄 백발의 노인은 이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렁그렁한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옆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해보세요"라고 했지만 말을 잊은 듯 손수건으로 눈물만 닦았다.
바닷물이 반쯤 찬 갱구(탄광 입구)를 바라보고 차려진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올린 전석호(92)씨는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사이 누군가 가져다 놓은 스피커에서 구슬픈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한일 양국의 취재진을 만난 전씨는 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하기 전 가족이 함께 탄광 근처에 살았다고 했다. 사고가 난 후에는 갱구가 막혔고, 그는 매일 이곳을 찾아 울었다며 "가슴이 아파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슴 아파 말이 나오지 않는" 비극의 현장
지난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바닷가 근처에 있는 조세이탄광(長生炭鑛·장생탄광) 입구인 갱구 앞에서 한국과 일본 유족 20여 명이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이곳은 지난 1942년 2월 3일 바닷물이 갱도로 흘러들면서 조선인 노동자 136명을 포함한 183명이 수몰돼 사망한 곳이다.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조세이탄광 갱구가 지난 9월 26일 일본 시민단체의 힘으로 열렸다. 일본 시민단체인 '장생탄광의 물비상(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회(아래 새기는회)'는 조세이탄광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장비를 동원해 찾았다.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진 갱구는 폭 2.2m, 높이 1.6m로 입구를 막고 있던 송판을 깨부수자 물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