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서도리 장촌마을에 있는 남상규선생의 공적비
박근세
해방 후에는 부산 중앙수산시험장(현 수산과학기술진흥원) 어로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수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최초의 원양어업 시험조업 단장을 맡아 원양어업을 개척한 공적은 두고두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남상규 선생은 해외 생활 중 급서하셔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친인척과 여러 경로를 통해 발굴해 왔다. 수산인의 위상을 높여준 남상규의 길을 따라가 본다.
원양어업의 태동
어려운 형편에서도 정부는 원조자금의 20%인 거금 32.6만 달러를 들여 미국 시애틀 수산시험장에서 시험선으로 쓰던 중고 선박 워싱턴(Washington)호(219톤)를 매입하기로 했다. 저인망 어업과 연승 어업이 가능한 냉동설비와 어군탐지기 등 당시로서는 최신 전자장비를 갖춘 종합 시험선이었다.
1949년 우리나라 예산은 1억 8천만 원으로 국민 소득은 70달러가 넘지 않은 가난한 나라였다. 미국의 ECA(경제협력처)의 원조 자금에 크게 의존하던 시절이었고 같은 해 미국 원조 자금은 1억 5천만 달러(환율 450원, 약 68억 원)였다. 그냥 퍼주는 공짜 돈이 아니고 미국의 통제와 불평등한 내정 간섭을 받기로 한 대가였다.
한국 정부로서는 무모한 모험이었지만 배만 있으면 고기를 쉽게 잡아 올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이야 경제 부흥으로 여수 국동항에도 더 좋고 값비싼 선박들이 수없이 정박해 있지만 당시에는 소형 동력선도 귀한 시절이었고 바람을 이용한 범선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다.
군함도 아닌 어선 워싱턴호를 넘겨받기 위해 대한민국 초대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 소장과 10명의 해군이 직접 미국 시애틀로 건너갔다. 한국인 중에는 그렇게 큰 디젤 엔진 선박을 구경조차 해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18일 드디어 미국 시애틀을 출발하여 40일 만인 11월 28일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많은 국민이 부두에 나와서 환호하였고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뿐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쪽으로 가서 부(富)를 건져 올려라'라는 뜻으로 배 이름을 손수 지남호(指南號)라고 명명까지 해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름 지어 준 원양어선 지남호
12월 6일 부산 제1 부두에서 지남호 명명식에는 3부 장관과 미국 사절단까지 참석하여 성대한 명명식이 거행되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작은 어선 한 척이 항공모함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오늘날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랐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지지만, 해방 직후 우리의 국력이었고 한계였다.
남쪽에서 부를 건져 올리려 했던 지남호는 해무청에서 관리하면서 도입 의도와는 다르게 운영되었다. 해상순시선 겸 제주도 출장용으로 단순 임무만을 수행한 것이다. 어선으로 활용하려 해도 배를 운용할 만한 인재와 어구들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6.25를 겪으면서 궁핍한 국가 재정으로 단순한 업무에 매월 거액의 관리비가 큰 골칫거리여서 매각에 나서게 된다. 다행히 원양어업을 통한 외환 획득 조건이었는데 임자가 나타났다.
23만 9천 달러에 불하받은 이는 마산에서 몽고간장을 운영하면서 원양어업의 활로를 찾던 제동산업의 심상준 사장이었다. 심 사장 역시 배를 인수하여 6년간이나 활로를 찾아 연근해 어업과 대일 활어 운반선으로 투입하였지만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서 부를 건져 올려라!
남상규 어로과장이 근무하던 중앙수산 시험장에는 OEC(주한 경제조정관실) 수산 고문으로 모간(A. M. Morgan)이 파견 나와 있었다. 남 과장과 전직 참치잡이 선장 출신이었던 모간은 업무적으로 자주 만나다 보니 농담을 나눌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되었다.
남 과장을 만나기만 하면 " 한국도 참치 원양어업에 서둘러 진출해야 한다"고 부추겼고 자기가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고 다녔다. 이를 유심히 들어 왔던 남 과장은 고심 끝에 제안서를 올려 국가적 사업으로 "투나 연승어업 시험조업 단 인도양 출어"라는 사업을 인가받기에 이른다.
1957년 6월 26일은 국가적인 관심이 쏠린 역사적인 날이었다. 서둘러 준비한 행사장에 장맛비가 쏟아지자 행사장을 해양경찰대 강당으로 옮겼다. 경찰악대의 경쾌한 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상공부 장관과 해무청장 등 귀빈들이 참석하는 성대한 행사였다. 참석 귀빈들의 축사가 끝나자 단장을 맡은 해무청의 남상규 어로과장의 답사가 이어진다.
우리가 가는 어장은 무더운 적도 부근의 인도양입니다. 수천 마일이나 되는 먼 바다로 기후도 다르고 항해와 조업에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험난한 여건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국민이 기대하는 이상의 실적을 거두어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힘들었던 시기에 해외 어장 개척에 국운을 건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은 전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아주 특별한 출어식이었다. 앞으로 60일간의 장도에 올라 인도양에 참치어장 개척과 15만 불의 외화 획득이라는 비장한 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실제 출어는 이보다 3일 늦어진 6월 29일에야 이루어졌다.
당시 연승참치어업은 일본이 세계시장의 50%인 20만 톤을 독점하는 주력 산업이었다. 시험조업 단장은 남상규 해무청 어로과장이 맡았고 선장은 제동산업의 윤정구씨가 맡아 27명이 승선했다. 기술 고문을 맡은 모간은 대만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드디어 온 국민의 희망을 가득 실은 초라한 어선 한 척이 부산항을 유유히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