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혜와 소현숙, 두 노동자는 언제쯤이 되어야 이겨서 땅을 딛게 될까.
서부원
세상에서 가장 거리가 먼 게 머리부터 가슴까지라는 말을 순간 절감했다. 아침에 일어나 여느 때처럼 신문을 읽다가 광고면의 '300'이라는 숫자에 꽂혔다. 강제 해직된 두 여성 노동자가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공장 건물의 옥상에서 농성을 벌인 지 300일이 됐다는 내용이다.
사실 모르진 않았다. 지난 2022년 공장의 화재로 폐업을 결정한 뒤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고, 이를 거부한 17명은 정리해고했다. 이들 중 7명은 모기업이 같을뿐더러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는 평택의 다른 자회사 공장으로 고용 승계해 달라고 요구하며 농성 중이다.
일본 기업 니토덴코가 100% 지분을 소유한 한국 옵티칼 하이테크 구미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폐업한 뒤 생산 물량이 평택으로 옮겨져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 요구는 당연했지만, 기업은 외면했고 되레 평택공장에 별도의 인력을 새로 채용했다.
그들로부터 제품을 납품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다. 납품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생존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형국인 걸까. 언론의 시선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누구는 '연대 버스'라고 했고, 다른 누구는 '희망 버스'라고 불렀다. 지난여름의 역대급 폭염을 콘크리트 건물 옥상에서 오롯이 견뎌낸 그들이 외롭지 않도록 손 맞잡아주자는 제안이었다. 농성 300일째인 11월 2일에 맞춰 전국 각지에서 '응원군'을 실은 버스가 모일 예정이었다.
"빈자리가 없는데, 어쩌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담당자의 목소리엔 아쉬움과 고마움이 반반 섞여 있었다. 버스 대신 승합차 두 대로 가게 됐다면서, 단체 참가 신청인지를 먼저 물었다. 비록 출발 하루 전이지만, 그렇다면 차량을 추가로 섭외해야 한다는 뜻이다. 혼자라고 했더니 조금은 놀란 목소리였다.
담당자로서 기대보다 신청자 수가 적다는 아쉬움이 내 전화 한 통으로 위로받은 듯했다. 그도 알 것이다. 직접 버스를 타지는 못 하지만,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적지 않다는 사실을. 지금도 그들의 농성 소식을 전하는 카톡 상태 메시지가 속속 올라온다.
편도 240km를 달려 도착한 곳
이곳 광주에서 경북 구미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그러나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가야만 한다는 다짐이 편도 240km라는 물리적 거리를 훨씬 가깝게 느껴지도록 했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주고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깟 피곤함쯤이야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후 2시로 예정된 집회에는 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모인 '동지'들과 어깨를 겯고 함성을 지르는 벅찬 감동을 포기하는 대신, 300일 동안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으로 방치된 현장을 사죄하듯 걷고 싶었다. 운이 닿는다면, 농성 중인 두 분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던 오후 5시 반경 농성 현장에 도착했다. 구호와 함성으로 뒤덮였을 공장 앞 너른 주차장에는 사방에 내걸린 현수막들만이 늦가을 칼바람에 맞서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고용 승계를 책임지라는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단체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면, 집회 시간에 맞춰 왔을 것이다. 주차장의 어느 한쪽에서 단체의 이름이 적힌 깃발 아래 줄지어 앉아 주먹을 불끈 쥔 채 목청을 돋웠을 것이다. 여느 집회가 그러하듯, 농성 중인 그들을 향한 연대의 외침은 기실 자신을 향한 위로이자 다짐이 될 테다.
그런데도 어둠이 사위에 내린 그 시간에 찾아온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모두가 한꺼번에 떠난 뒤 그들에게 엄습해 올 쓸쓸함이 걱정됐다. 마치 온 가족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 자녀들의 귀경길에 배웅 나와 손 흔드는 부모님의 쓸쓸한 모습과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