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3일 반핵아시아포럼 청년세션에 모인 청년들이 놓은 '아시아청년 탈핵연대'라는 디딤돌은 아시아 탈핵운동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들이 만들어 갈 탈핵과 기후정의를 응원한다.
공혜원
2025년 반핵아시아포럼은 5월, 마지막 핵발전소 폐쇄를 앞둔 대만에서 열릴 예정이다. 아시아국가로는 처음 탈핵을 이뤄내는 대만에서 아시아 청년들이 만나 희망 섞인 탈핵·탈송전탑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한 발짝 떨어지니 보이는 것들
큰 환경단체에서의 일이 궁금했던 공혜원씨는 고 3 때 인턴십으로 녹색연합 에너지기후국에서 활동했다. 밀양에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국가폭력과 맞서야 하는 날 선 생활을 하고 서울로 올라오면 화려한 불빛, 따스한 방에서 죄의식 없이 편히 소비하는 전기들을 마주하며 공혜원씨는 밀양 송전탑 문제와 부정의한 에너지 체계를 서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인권단체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일하면서 탈핵 세션을 만들고 탈핵과 인권관련 영화를 상영했다. 그 후 에너지정의행동,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등을 거치며 탈핵과 에너지에 대해 공부하고 활동했다. 서울시 원전하나줄이기 사업을 진행하는 부서에서 기간제로도 3년이나 일했다. 밀양은 그렇게 공혜원씨 삶에 스며들었고 에너지 관련 이력들이 쌓였다. 그러나 탈핵과 에너지운동은 하면 할수록, 파면 팔수록 어려웠다. 한 발짝 떨어져 있겠다고 마음먹었다. 공혜원씨에게 탈핵운동의 무엇이 어려웠고, 에너지운동에서 한 발 떨어지니 어떤 것들이 보였는지 물었다.
"에너지문제는 내용 자체가 어려워요. 활동가가 전공자나 전문가처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연차가 쌓이다 보니 설명을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니 알아야 했고, 내용에 접근하려니 어려웠어요. 그런데 더 중요한 어려움은 탈핵운동이 지역주민들 이야기나 도시에 사는 전기소비자들의 이야기로 치환되기 어렵고 지역과 도시, 주민과 연대자로 자꾸 이분화되더라고요. 저는 핵발전구조와 기계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탈핵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에너지 전문가인 이헌석, 김현우 선생님 같은 분들이 하면 돼요(웃음).
핵발전소를 겪어온 주민들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야 하고 개인과 지역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피해로 확산시키는 것이 탈핵운동이라고 생각해요. 핵발전소 주변지역 주민들의 암 발생률이 높고 삼중수소 등 인공방사능 물질이 소변에서 섞여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해요. 우리도 인과관계를 과학적, 의학적으로 입장하라는 식의 핵산업계의 프레임에 너무 오랫동안 길든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탈핵잇다' 같은 구술작업은 중요한 운동방식이에요."
공혜원씨는 서울은 중앙이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지역이라고 말한다. 에너지관련 시설이 없고 생산지의 경험이 없는 거대한 전기소비자들이 핵발전소 주변지역 사람들이 겪는 정신, 육체적 피해를 알기 어렵고 핵산업계가 주민들을 어떻게 길들이고 갈라치는지 세세히 알 수 없다. 핵발전이 위험하고 방사능에 대한 공포와 늘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핵발전소 주변지역 주민들도 안다. 그러나 그 위험을 인정하면 자신이 딛고 선 삶의 터전을 부정해야 하고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거대한 핵산업계에 길게 저항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1979년 고리1호기를 시작으로 25기의 핵발전소를 생기고 운영되는 동안 지역주민들은 거센 저항, 갈등과 분열, 이주대책 요구, 순응과 종속의 과정을 거치며 핵발전소 주변지역민으로 살아간다. 밀양이나 청도 송전탑 반대투쟁이 마을에 남긴 상처와 일상의 반목과 고립은 새벽별 보면서부터 새까만 밤이 내리도록 산꼭대기 움막을 지키던 때보다 삶을 더 힘들게 한다. 부안, 영덕, 삼척, 영광, 울진, 월성, 밀양, 청도, 봉화, 당진, 홍성 등 핵폐기장반대투쟁과 신규핵발전소 반대, 탈송전탑 투쟁에 나선 지역주민들 가슴속엔 불구덩이가 한 움큼씩 자리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랑 살아서 그런지 할머니랑 친해요. 할머니랑 냉이 캐러 가는 것이 저희 '행복한 것들' 중 하나에요. 그래서 할머니가 노인정에서 크고 작은 다툼 때문에 끙끙 앓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속상해요. 할머니가 '인싸'거든요. 노인정은 할머니 일상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간이고 관계들이 모인 곳인데 외면할 수도 없고, 노인정에 나가자니 상대방 볼 생각에 속이 끓고 하는 거죠.
핵발전소 주변지역 주민들도 찬성과 반대, 갈등과 배신이라는 극단적인 프레임만으로 예단할 수 없는 감정과 갈등들이 많을 거예요. 할머니는 몇 날 며칠 속 끓이다가 스~윽 하고 떡을 내밀며 관계를 정리해요. 마을에서 개인 사이의 다툼도 일상을 지배하는데 이해관계가 첨예한 핵발전소 주변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핵발전 인근 지역에서의 갈등만이 아니라 연대하는 다른 지역의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기 마련이겠죠. 탈핵 관련 연대단체 회의에 모인 동료들의 지친 모습 보기도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에너지 운동에서 한 발짝 떨어져 보기로 했어요."
한 발짝 떨어지니, 방황도 함께 오더라는 공혜원씨는 회계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회계 관련 자격증을 따며 취업을 준비했다. 밀양대책위는 2019년 '밀양·청도송전탑투쟁'을 담은 아카이브 제작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했고 공혜원씨는 밀양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밀양·청도 송전탑반대투쟁 온라인기록관'작업을 하면서 다시 제게 이 운동이 맞다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크고 먼 것이 보이는 것 같아요. 지금쯤이면 밀양행정대집행 10년 준비 모임 꾸려야 하고 바로 나아리 이주대책위 상여투쟁 10년, 11차 전기본 투쟁이 쭉 이어져야 하는데 왜 움직임이 없지? 궁금해하고, 참견하다, 현장에 연락하고 기획팀 꾸리고 다시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거죠. 6월 8일 밀양행정대집행 총괄팀장도 참견하다 일을 맡아 버린 거예요."
송전탑을 감각하다
지난 2014년 6월 11일 765kV초고압 송전탑 저지를 위해 송전탑 예정지 이름을 딴 움막을 짓고 저항하던 밀양주민과 연대자들을 막고 무자비한 공권력이 기어코 세운 송전탑을 보며 밀양주민들은 '언 놈이 씨부려도(어느 누가 떠들어도) 탈핵 탈송전탑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다시 내걸고 팔도를 돌아다니며 핵발전과 송전탑의 위험을 알려냈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와 함께 '언 놈이 씨부려도'는 밀양 송전탑 투쟁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되었다.
2024년 6월 8일, 10년 전 밀양주민과 함께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싸웠던 '밀양의 친구들' 1500여 명이 '희망버스' 22대를 타고 다시 밀양에 모여들었다. 한 발짝 떨어져 참견이나 하겠다던 공혜원씨는 밀양행정대집행 10년 행사의 총괄팀장을 맡았다.
"'탈탈세미나'에서 올해 전망을 하면서 밀양·나아리 10년과 11차 전기본 대응을 흐름 있게 가져가 보자는 의견을 나누고, 올해 초부터 조직을 꾸렸어요. 밀양지역 시민사회는 밀양 현장이 갖는 상처와 갈등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선뜻 나서기 어려워했어요. 부산, 울산 시민사회 탈핵활동가들이 짱짱하게 현장을 받쳐주고 청년들로 조직, 홍보 실무팀을 꾸렸어요. 기획팀, 조직팀, 홍보팀에 각각 10여 명씩 꾸려졌고 주 1회 점검 회의를 했어요. 저는 총괄팀장이라 일주일에 약 4번 각 팀 회의 참여했어요. 전국에서 모인 활동가들인데 합이 잘 맞았고 일하는데도 신이 났어요."
공혜원씨는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아래 셰어)' 사무국장이다. 현직 업무량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40여 명의 활동가와 신나게 합을 맞춘 총괄팀장의 비결을 물었더니 "밀양이잖아요"라고 답한다. 10년 세월 너머, 빗속을 달려온 1500여 명도 같은 마음이었지 싶다.
"송전탑을 '감각'하게 하고 싶었어요. 10년 전 밀양에 와 본 사람이나, 10년 후 밀양에 처음 온 사람이나 송전탑을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이니 송전탑을 감각으로 느껴보는 것이 중요했어요. 사전 행사로 밀양시 여수·고정·평밭·용회마을과 경북 청도군 삼평리 등 5개 마을로 나눠 참가자들이 송전탑 아래 서보는 경험을 했어요. 송전탑은 비 오는 날, 더 무섭거든요. 크게 울리는 웅웅 거리는 소리와 비행기 충돌을 막으려고 빨간빛을 내는 송전탑의 기괴함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거예요. 기괴한 풍경을 매일 봐야 하는 마을 주민들의 심정도 조금은 감각하지 않았을까요?"
행사 당일 점검회의를 마친 오전 10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져 5개 마을 송전탑 체험도, 오후 4시 밀양강 둔치공원에서 열린 결의대회 진행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10년 세월 동안 힘 빠진 무릎을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걸을 수 있는 밀양 할매, 할배들의 안전이 걱정이었다. 22대의 희망버스가 출발한 곳으로 떠나자마자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10년 행사가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힘든 주민들에게 위로와 힘이 될지, 비까지 와서 행사장에 나와 계신 것이 힘든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으로 앞에서 사람들을 마주 보는데 밀양주민들과 참가자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는 거예요. 행사에 의무적으로 온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이 와 있다고 느꼈어요. 비가 쏟아지는데 웃고 있으니까 미친 사람들 같기도 했어요(웃음). 제가 무대 옆에 서 있으면 팀원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 하는 게 다 보여요. 그냥 그렇게 서서 사람들 웃는 것 보고 행사 내내 실무팀과 눈 맞추고 마음 나눴던 그 시간이 모두 좋았어요."
셰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공혜원씨는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사무국장이다.
셰어 홈페이지에는 '누구도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고, 자유롭고 건강하게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누리며 충분한 정보와 평등한 자원을 바탕으로 서로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라고 비전을 밝혀놓았다. 셰어와 탈핵 탈송전탑, 기후정의 운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