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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항일무장투쟁의 큰 별 '서일 총재'를 아십니까

[중국동북3성 여행기7] 투쟁의 중심에 섰던 서일의 공적, 이런 이유로 묻혀있었다

등록 2024.11.04 13:55수정 2024.11.0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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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일총재 항일유적지 앞에서 기념촬영한 일행들
서일총재 항일유적지 앞에서 기념촬영한 일행들오문수

일행의 중국 동북 3성 여행 목적지는 중국과 러시아 국경이 가까운 밀산이다. 일행이 연변에서 1000㎞ 떨어진 밀산 방문을 고집한 이유가 있었다.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에 섰던 서일 총재의 기념비와 유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이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을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으로만 알고 있다. 필자도 이번 여행에 나서기 전까지 서일 총재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밀산에 도착해 시정부가 세워 놓은 거대한 서일 기념비와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후 귀국해 공부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다음은 <대한군정서총재 서일>을 쓴 정길영의 주요 내용이다. 서일은 교육자이자 애국 계몽 운동가이며, 종교 지도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군사 전략가이다. 한 마디로 만주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공적이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유가 뭘까. 정길영은 서일의 공적이 묻힌 이유를 자기 책에서 다음과 같이 들었다.

"출생지가 함경북도 경원으로 북한에 위치한 점, 그리고 광북 후에 그의 후손들은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후손들이 뒤늦게 한국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은 할아버지의 위대한 업적을 밝힐 여력이 없었다. 또한 연구자들이 서일에 대한 관심이 없고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수하 장령이었던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의 업적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다."

대종교를 기반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서일

 서일총재 모습으로 정길영 저자의 책에서 재촬영했다.
서일총재 모습으로 정길영 저자의 책에서 재촬영했다.정길영

서일은 청소년 시절 애국심이 강했다. 또 국경 문제 전문가인 김노규 선생과 함경도 지역에서 근대적인 애국계몽운동가이며 경성에 함일학교를 세운 이운협 선생으로부터 배우며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통한 애국심과 학문적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대종교 중광교조 나철을 만나 크게 감화를 받아 대종교 포교를 통한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을 마련하면서 삼일철학을 체계화하였다. 대종교의 수행은 뭇 중생을 참사람이 되게 교화하고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대종교 포교를 불허하고, 1914년에는 대종교 해산 명령을 내렸다. 결국 나철은 일본 천황에게 대한제국의 독립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장문의 글을 보내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서일은 1919년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의 권유로 대종교 최고지도자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 에게는 조국 광복 사업이 우선이며 대종교는 오직 항일운동을 수행하는 정신적 지주였다.


스승의 죽음을 본 서일은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이 땅에서 일본을 몰아낼 수 있는 길은 전쟁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10년 동안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키워왔으며 1920년의 독립 전쟁을 주도했다.

당시 북간도에 사는 동포들에게 서일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는 이범석의 회고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아래 내용이다.

"서일의 도덕과 식견은 북간도와 두만강 이남 함경북도 전반에 걸쳐 중망(衆望)을 한 몸에 받았다."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 된 대한독립선언서

서일은 본격적인 대일항쟁에 나서기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명분을 공표하며 1918년 '대한독립선언서'를 공표했다. 당시 서일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사들은 39인으로 대일항쟁사의 주역들이다.

김교헌, 윤세복, 김동삼,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김좌진, 이시영, 이상룡, 신채호, 이동녕, 안창호, 이승만, 등등

대한독립선언서는 2.8 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이랄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당장 일본과 싸울 수 있는 군대가 필요했는데, 당시 상황으로 이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세력은 서일이었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6일간에 걸쳐서 전개된 9개 전투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를 대변하던 <독립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한 일행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한 일행들오문수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 부하 300명은 대소 전쟁 10여회에 걸쳐 왜병 12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청산리전투는 일본군 3개 여단이 동원됐고 한국군은 비전투원까지 합하여 약 1800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1/10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승리한 청산리전투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국독립운동사>는 청산리전투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나중소, 이범석, 한근원, 김훈, 이경성, 강화린, 최인열 등이었다고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백운평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의 3개 만을 다루고 있다.

홍범도 부대의 전투가 언급되지 않았으며 대한군정서의 수장인 서일에 대한 공적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청산리전투의 승리요인으로는, 상대적으로 아군에 유리한 지형에서 매복 공격한 것을 들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유리한 지형에서 싸운다고 해도, 무기 하나 없이 싸울 수 있는가?

 목단강시 공원에 세워진 '8녀투강' 동상. 1938년 10월 상순, 주력부대의 도강을 돕기위해 일본군과 유인작전을 하며 싸우던 부녀 8명이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되기 직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8녀 중에는 이봉선, 안순복이라는 동포 이름도 적혀 있었다
목단강시 공원에 세워진 '8녀투강' 동상. 1938년 10월 상순, 주력부대의 도강을 돕기위해 일본군과 유인작전을 하며 싸우던 부녀 8명이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되기 직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8녀 중에는 이봉선, 안순복이라는 동포 이름도 적혀 있었다오문수

김재두는 책 <청산리전투의 재조명-체코 여단과의 만남>에서 서일의 대한군정서가 체코 여단으로부터 세계 수준의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한 것을 청산리전투 승리의 중요한 시발점으로 보았다.

청산리전투 패전으로 악에 받친 일본군은 독립군뿐만 아니라 간도 일대의 일반 양민들까지 거의 무차별적인 살육을 벌였다.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대한군정서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켰다.

10개 단체 병력 3500명으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독립군은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관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이청천으로 꾸려졌다. 독립군은 혹한과 헐벗고 굶주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밀산까지 이동했다.

 1909년 이상설 등이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 밑 기름진 터를 사들여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여 100여 가구의 한인을 이주시킨 곳이다. 이름을 '한흥동'이라 지은 봉밀산촌이 있는 곳으로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1909년 이상설 등이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 밑 기름진 터를 사들여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여 100여 가구의 한인을 이주시킨 곳이다. 이름을 '한흥동'이라 지은 봉밀산촌이 있는 곳으로 한흥동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이다.오문수

밀산은 중국 흑룡강성 '계서시'에 위치한 항일투쟁지이다. 산에 벌과 꿀이 넘쳐나는 곳이라고 하여 '봉밀산(蜂蜜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당시엔 독립운동에 적합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1909년 이상설 등의 위탁을 받고 이승희가 토지를 매입하여 조선인을 이주시키고, '한흥동'을 세워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안창호는 신민회 단원을 파견하여 45만 평을 구입하여 조선인들을 집단 이주시키고 독립군의 군량미와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이후 밀산무관학교, 대한독립단, 대종교 총분사 등이 세워져 독립투쟁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궤멸 상태까지 간 항일 무장 독립군...비통해하던 서일총재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은 그러나 상해파,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으로 양분되어 각 세력 간 알력 싸움이 벌어졌다. 한편 일제는 소련 영내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일본군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소련은,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상해 고려공산당의 입장을 따르던 독립군이 이에 불응하자 공격을 감행, 당시 사망자 272명 등 6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서일은 1921년 6월에 일어난 '자유시사변' 후 당벽진에 주둔하며 둔병제를 실시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중 8월 17일 밤 비적들의 습격을 받아 심대한 손실을 보았다. 심신에 극도의 타격을 받은 서일은 8월 26일 당벽진 뒷산에서 순직했다고 알려져 있다. 향년 41세였다.

 밀산에는 제주도 2배 크기의 담수호인 홍개호가 있다
밀산에는 제주도 2배 크기의 담수호인 홍개호가 있다안동립

자유시에서 분열과 배신으로 인한 대한독립단의 참혹한 해체는 자유시사변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10년 넘게 양성한 대일항쟁군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이후 김좌진은 공산주의자가 된 부하에게 암살당했고,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당해 극장 경비 일을 하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도 자유시 참변이 낳은 가장 큰 불행은 서일의 죽음이었다.

밀산을 돌아보고 연변으로 돌아오는 차 속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성토장이 됐다. 이때 국악가 엄수정씨가 "제가 노래 한 곡 부를께요"하며 부른 노래는 안치환의 <광야에서>였다.

과거 '한흥동'에 세워진 무관학교 자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수수밭의 현재 모습
과거'한흥동'에 세워진 무관학교 자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수수밭의 현재 모습안동립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의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일행은 모두 숙연해졌다. 만주에서 피땀 흘려 항일 무장투쟁을 한 독립군들의 발자취를 보았기 때문이다. 백종인 교수가 입을 열었다.

"어느 땅 어느 산하에서도 내 땅을 버리고 험한 곳에 와서 독립운동한 애국지사들에게 감동을 느낍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좀 더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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