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가을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서울 한양 도성 뒤 백악산 둘레 길 인문학 여행 가는 날이다.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 하던가. 설렌 마음으로 서둘러 출발한 바람에 예정 시간보다 일찍 서울역 도착이다.
지난 2일, 먼저 길상사로 향한다. 길상사는 예정된 장소는 아니지만 약속된 장소와 가깝기도 하고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길상사에 들어서니 다른 절들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분위기라는 인상을 받는다. 둘러보니 백석 시인을 한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곳이었다. 그저 가벼운 사랑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녀는 평생 모은 재산을 보시한 후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 한 구절처럼, 흰 눈이 푹푹 쌓이던 어느 날 한 줌의 재가 되어 백석 시인 곁으로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자기 재산은 백석 시인의 시 한 줄 만도 못하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사랑을 뒤로하고 외국 대사관 거리를 지나 약속된 삼청각으로 걷는다. 삼청각은 백악산 자락 숙정문 근처 산림이 잘 우거진 곳으로 남북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은 누구나 그곳을 자유롭게 즐긴다.
이날, 마침 야외에서 전통 혼례식을 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혼례를 지켜보다 일행이 있는 식당으로 향한다. 발걸음을 잠시 멈춰 눈을 흘겨 주변을 살펴본다. 고즈넉한 정자 마루에 국수(國手)를 기다리다 지친 바둑판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애처롭기까지 하다. 필자라도 정자 마루에 앉아 옛 친구와 수담(手談)이나 나누고 싶다.
가을이 지천이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다. 가을 향기 마시며 숙정문을 지나 백악산 청운대로 치고 올라 수도 서울을 내려다본다. 경복궁이 한눈에 보이고 저 멀리 빌딩들이 우뚝 솟아 있다.
삼봉 정도전은 왜 백악산을 경복궁의 주산으로 삼고자 했는가. 비록 삼봉의 마음을 관통하지는 못했지만, 청운대에서 서울을 굽어보니 그동안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다.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이 광활한 만주 벌판에 이르러 호곡장(號哭場)이라 외친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백악산 산행을 계속하면서도 다음 코스 윤동주 문학관이 눈에 아른거려 발길이 분주하다. 문학관으로 가는 길목이 창의문이다. 부암동 창의문은 한양 도성 4 소문 중 하나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능양군(인조) 일파 반정 군이 도성 안으로 치고 들어온 첫 관문이기도 하단다. 생각건대 반정 군들은 창의문을 열어준 문지기가 한없이 고맙겠지만 광해군이야, 창의문 문지기가 얼마나 야속했겠는가. 창의문의 역사는 그렇게 능양군 인조의 편에 서서 흐르는 것 같았다.
창의문을 지나서 윤동주 문학관에 들어서니 그의 연희 전문 시절 우물을 소재로 쓴 <자화상> 시가 우리를 맞이한 듯하다. 시인의 우물 속에는 하늘과 바람과 가을이 가득했고 한 사나이의 감정마저 뒤섞여 있는 듯하다.
문학관 뒤 언덕 배기에는 윤동주 <서시>가 거대한 돌에 새겨 있다. 서시 바로 옆에는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이 인왕산뿐만 아니라 백악산을 배경으로 진경산수화를 그렸던 흔적이 있다. 중국풍 산수화를 거부하고 진짜 조선의 산수화를 그리고자 했던 겸재 정선과 일제의 강점기에 한글의 시(詩)만을 고집했던 문학청년 윤동주 시인의 흔적이 나란히 한 언덕에 있다. 이채롭다.
한 뼘의 언덕이라도 더 올라 백악산을 바라본다. 연희 전문 학창 시절 시인 윤동주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 언덕에 올라 시적 상상력을 키우면서 바라본 산이라고 한다. 이제 인걸(人傑)은 없고 그의 흔적만이 백악산을 지키고 있다.
예상보다 많은 길을 걸었더니 허기도 지고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백악산 둘레 길 인문학 여행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해야만 했다. 내려오는 길모퉁이에서 뻥튀기를 팔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정겹고 부암동 맛집답게 식당 앞에서 옹기종기 한참을 기다린다. 충만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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