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청소년마을학교 날다에서 마련한 <괜찮아, 앨리스> 상영회
서배성
꿈틀리 인생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배우지 않는다. 지필 고사도 없고, 수행 평가도 없다. 대신 기숙사 생활을 하며 스스로 규칙을 정한다. 빨래도 청소도 직접 해야 한다. 대학 갈 때까지 공부에 집중하라는 일반 학교와는 지향점이 다르다. 자기 삶을 살고 싶으면 생활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학교의 교육 과정은 자연의 시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봄이면 넋 놓고 벚꽃을 바라볼 수 있고, 때 맞춰 모내기를 한다. 다른 지역 학교에서 친구들이 오면 모내기법을 알려준다. 꿈틀리 학교가 위치한 강화도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분다. 영화 속 앨리스들은 우리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진리를 매 순간 느끼려 한다.
풍경화를 멍하니 바라보며 이완하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동안 내 호흡도 깊어졌다. 보통의 대한민국 십 대와 달리 탈 없는 미소를 짓는 학생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그 곁의 사람도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십 대는 귀해 보였고, 나는 무척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쉬었다 가도,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길로 가도 괜찮아"
영화에서는 괜찮다는 대화가 자주 오갔다. 지금 그대로도 괜찮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공립 중학교에 재직 중인 한 선생님이 말했다. 한국의 아이들은 예비된 실패자들이라고. 소수의 승자만이 주목받는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승자가 아닌 쪽으로 분류될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슬픔이 얼마나 큰지 헤아려야 한다는 걱정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문득 우리 사회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어째서 모든 아이들이 각 분야 최고가 되어야 하는 걸까.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은둔하는 청년이 50만 명을 넘어섰다. 극단적인 형태의 경쟁에 기반한 솎아내기식 삶은 비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그냥 사람이 타고난 대로 자기 적성과 흥미껏 살아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다면 학교도 한결 느슨해질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다녀온 가을 산을 떠올렸다. 가을 산에는 욕심내는 존재가 없었다. 낙엽은 바람 부는 대로 떨어지고, 다람쥐는 자기 재주껏 도토리를 먹었다. 단풍 씨앗은 땅에 닿는 대로 싹을 틔우려 했다. 다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살았다. 사람처럼 온갖 욕망을 덧씌워 남을 이기려 하거나, 더 가지려 하지 않았다.
나만 경쟁에 신물이 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영화 종료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진지한 문답이 오갔다.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국가에서 예산을 지원받는 공립형 대안학교 모델은 어떻게 추구되어야 하는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공동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나는 자주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중에서도 양지혜 감독님의 말씀이 좋았다.
"내 안에서부터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정에서부터 내 아이에게, 그리고 내 친구와 이웃에게 진짜로 괜찮다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