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행진 포스터
트랜스해방전선
안녕. 혜연이야. 잘 지내고 있어? 여긴 딱 티디오알(TDoR, 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국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에 맞게 추워졌어. 국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11월 20일). 네가 모를 일은 없겠지. 네 기일 말고도 추모하는 또 다른 날이니까.
잊지 않고 올해도 잘 찾아와 함께 행진했니? 나는 그게 항상 궁금하더라. 그래서 가끔 귀신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곤 해. 여정을 떠난 그곳은 어때? 여기만큼 추운가? 우리는 추워진 만큼 다가온 연말에, 송년회다 신년회다 여러 일정이 많이 생기고 있어. 혹시 너희도 바지런히 다가오는 연말을 맞아 그리웠던 이들을 찾아가보고 있니? 내 친구가 너를 꿈에서 봤다고 하더라고. 너희 진짜 나쁘다. 나한텐 한 번도 꿈에 안 나와. 뭐 더 보고 싶은 사람들 부지런히 만난다고 있다고 생각할게.
11월 초만 해도 너무 더워서 행사할 때 꽤 고생했는데, 고작 며칠 만에 극세사 이불을 덮지 않으면 안될 만큼 추워졌어. 날이 추워지면 아 곧 티디오알이구나 생각해. 올해도 그렇게 생각했어. 비록 16일에 열린 티디오알 행진에 함께 가진 못했지만 말이지. 비가 그렇게 많이 왔다더라. 나는 종일 아팠고. 다들 그리움과 슬픔에 각자만의 어려운 시간을 지났나 봐. 참 진부한 표현이지만 하늘도 슬펐나 보다. 그래도 내년에는 맑았으면 좋겠어.
사실 날이 더웠어도 추웠을거야. 너희가 떠날 때 알게 된 건데,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더라. 아무리 따뜻하게 둘러도 찬 바람이 쌩쌩 불더라. 그래도 펭귄들마냥 모여있으면 마음이 아무리 추워도, 데워지고 따뜻해지더라. 그래서 얼어죽지는 않더라고. 티디오알 때마다 그렇게 해서 추운 걸 조금 녹여보곤 해.
얘들아 있지, 나 이제 나이가 너희랑 점점 비슷해져가. 나 많이 컸지? 나보다 10살도 넘게 많았던 친구도, 두세 살 차이 나던 친구도, 이미 나보다 어려진 친구도 있다? 10살도 넘게 많았던 친구랑도 나이가 많이 좁혀졌어. 진짜 격없이 지내는 사이였지만 더 맞먹으며 지낼 수 있게 됐다. 좋다! 사실 너희랑 나이가 같아지기보단 함께 살았으면 더 좋았을거라 생각해.
근데 요즘 나오는 혐오 발언들 보면, 이걸 못 봐서 다행이다 생각하곤 해. 그때도 혐오 발언들로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이걸 봤으면 얼마나 더 상처받았을까. 느리게 느리게 바뀌고 있는 것들이 희망이 되어주지만, 작은 한 마디의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져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난 거잖아. 그 때 도움의 말을 전할 기회라도 줬다면 참 좋았을텐데. 그런 기회도 없이 훌쩍 가버리냐. 사람 서럽게.
그래. 그래도 세상이 바뀌긴 바뀌는 모양이야. 강도는 세졌어도, 그만큼 우세는 아닌 느낌이야. 옛날에는 압도당하는 것 같은 혐오였는데 말이지. 근데 논리는 너희가 살아있을 때랑 똑같다? 변함이 없다 저기는... 너희도 변함없기는 마찬가지구나? 그래도 뭐 세상이 바뀌고는 있다고 전해주고 싶었어. 아주 안 바뀐 것은 아니라고.
너희가 부지런히 꿈에서 서프라이즈 파티할 때 우리도 친구들을 만나. 예전엔 '죽으면 안 돼' 였는데 '죽지마'가 되고 '같이 살자'가 되고 '살아있어야해'가 되고 '살아'가 되고 '자연사 하자'가 되었어. 서로 부둥켜 안고 살아있어야해, 응 살아있을 거야라고 끊임없이 약속하기도 해.
너희도 약속은 했지만. 야속하다 너희. 정말. 우리와 헤어짐을 결심할 정도로 세상이 너무 아팠지. 나도 아픈 세상인데 너희도 많이 아팠겠지. 그러니까 그리 떠나갔겠지. 옛날에는 너무너무 밉기도 했는데 이젠 너무너무 미안하기만 해. 아픈 걸 좀 더 들여다보지 못한 것도, 혐오의 언어를 더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한 것도. 그냥 우리와의 끈을 놓는 게 더 편할 거라 믿었을 그 순간을 만들었다는게 미안해.
그래도 밉기는 해. 어떻게 우릴 떠날 생각을 해. 그렇게 잔뜩 행복한 기억을 용기를 사랑을 가득 담아줘놓고는. 난 약속한 대로 살아남아서 올해도 너희를 추모하고 있어. 비록 이 글이 너희한테까지 닿을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약속을 지키고 있어.
너희가 준 행복한 기억, 용기, 사랑이 가득 담긴 깨진 접시를 들고, 혐오의 풍파 속에서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있어. 나는 있잖아. 오래오래 살 거야. 너희가 미워서 아주 먼 미래에서나 만나려고. 그럼 내가 너희보다 나이가 한참 많겠지? 꼬꼬마 노인이 되어서 갈 수도 있겠지? 귀신도 간병이 필요하다면 너희에게 후일을 맡길 게.
사실 너희가 미워서 오래오래 사는 게 아니야. 너희가 깨진 접시에 꾸역꾸역 넣어준 사랑, 행복, 용기 그만큼은 베풀고 가야지. 근데 너희 덕에 만난 사람들이 밑빠진 독을 막아서 더 꾸역 꾸역 넣어줘서 오래 오래 살면서 베풀어야 되겠더라. 그래서 나 아주아주 나중에 갈지도 모르니까, 안 기렸다 해도 기다리지는 마!
올해도 너희를 아주 깊은 마음으로 추모해. 보고싶어. 잘 있어 각자 기일에 다시 만나자. 사랑해. 안녕.
[추신1] 그리고 이 편지를 읽고 있을 시간이 멈추지 않은 친구들아. 우리 잘 버틴만큼, 또 잘 살아보자! 윤활제 잘 발라서 시계가 잘 재깍일 수 있게. 똑딱이며 재깍이는 너희의 모든 시간의 소리를 소음이 아니라 음악으로 들을게. 연락은 자주 안 해도 돼. 그냥 언젠가 한 번씩 생각나면 나 잘 재깍이고있어요! 라고 해줘. 윤활제가 떨어져 멈출 것 같을 때도 꼭 와. 우리 모두 큰 소리로 똑딱똑딱 재깍거리며 세상을 뒤흔들자! 너희도 많이 사랑해. 올해도 똑딱똑딱, 너희 시간의 소리를 인생의 비지엠으로 내 시계도 시간의 소리를 낼 수 있었어. 고맙다. 나도 흘러가는 너희 시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옆에서 있을게. 귀 쫑긋 열고 재깍거리는 소리를 들을게. 나도 여기에 있다고 내 시간의 소리도 더 크게 낼게! 너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최대한 크게 재깍거리며 시끄럽게 할게. 그러니 부디 훌쩍 또 떠나지 말자. 진짜 진짜 사랑해!
[추신 2] 올해 우리 곁을 떠나간 전 인천퀴어문화축제 집행위원회의 고 이연수 활동가를 다시 한 번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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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어쩌다보니 얼레벌레 열심히 살고 있는 한량입니다.
풍파 없는 삶은 없겠으나, 저에게 닥친 이 해일과도 같은 삶을 어떻게는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비슷한 해일을, 바람을 맞는 이들에게 저의 삶의 이야기가 조금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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