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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범인 처단 지사, 왜 독립유공자 못 되나

[오늘의 독립운동가 73] 1897년 11월 21일 명성황후 국장일

등록 2024.11.21 11:04수정 2024.11.2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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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릉(고종과 명성황후 합분)
홍릉(고종과 명성황후 합분)국가유산포털

'명성황후'라는 시호로 알려져 있는 민자영은 16세 때 고종과 결혼했다. 그녀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공사를 벌이며 강제 노역과 물가 폭등 등 여러 실정으로 민심 악화를 초래하자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활용해 권력을 잡는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궁궐을 탈출해 전국 곳곳에서 숨어 지낸다. 그 틈을 타 흥선대원군이 다시 권력에 복귀한다. 그녀는 청나라 군대를 동원해 대원군을 몰아내고, 대원군은 청나라까지 끌려간다.

대원군은 친일로, 명성황후는 친러로

1884년 갑신정변으로 그녀는 다시 쫓겨난다. 하지만 또 다시 청군을 동원해 사흘 만에 권력을 되찾는다. 1894년 일본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복귀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된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사람을 동원해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배척하려는 조선 황후가 그들에게는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을미사변 주요 한국인 범죄자들

1897년 11월 21일 명성황후 국장이 치러졌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2년 하고도 1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고종과 황태자는 시신이 올바르게 놓이는지 확인하려고 묘실 안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명성황후 국장일을 맞아 참혹한 사건을 저지른 자들 중 한국인은 누구누구였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알아보니, 조선군 훈련대의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등 3명의 대대장, 전 군부협판(현 국방부 차관) 이주회가 대표 범인들이다.

이주회가 가장 먼저 죽었다(1895년). 을미사변 당일 흥선대원군을 옹위해 경복궁에 들어갔던 그는 김홍집 내각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 친일 고관들이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서둘러 사형에 처했다는 설도 있다.


입을 막기 위해 이주회 긴급 처단

이두황은 1916년에 죽었다. 1908년 전북 관찰사로서 의병 진압에 앞장섰고, 1910년 전북 장관에 다시 임명되어 1916년 3월 죽을 때까지 재임했다. (관찰사를 1910년 10월부터 장관, 1919년 8월부터 도지사라 불렀다.)

이진호는 1946년에 죽었다. 1908년 평북 관찰사, 1910년 경북 관찰사, 1916년 이두황의 후임으로 전북 장관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인 최초로 총독부 국장이 되었고, 1943년에는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까지 되었다.

칙선의원은 일본 국왕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이다. 이것을 박정희가 본받아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안을 유신헌법에 집어넣었다. 국가보안법, 고문 등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 통치를 위해 써먹었던 '기술'을 많이도 계승했던 것이다.

이두황 이진호는 도지사에 국회의원까지

석유를 부어 명성황후 시신을 불태우는 일에까지 가담한 우범선은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의 아버지다. 그는 네 명 중 이주회에 이어 두 번째로 빠른 1903년에 죽었다. 아관파천 후 친일 세력이 약해지자 일본으로 망명,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일본인 여성 사카이(酒井仲)와 혼인했고, 우장춘을 낳았다.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만민공동회 회장까지 지낸 고영근(高永根, 1853-1923)이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을 찾아왔다. 고영근은 강제 해산된 독립협회를 재건하기 위해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하려다 실패하고 일본에 피신 중인 상태였다.

만민공동회 회장 지낸 고영근, 우범선 정체 파악

두산백과에 따르면, 고영근은 "윤효정을 통해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전모를 전해듣"고는 "히로시마 인근 구레시[呉市]에 거주하고 있는 우범선에게 접근"해 그의 신뢰를 얻었다. 그가 방심하는 틈을 타 처단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윽고 1903년 11월 24일 때가 왔다. 고영근은 종자(현대의 비서에 해당) 노원명(盧遠明)의 도움을 얻어 우범선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이 일로 그는 체포되어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조선 정부가 나서서 일본과 교섭, 고영근은 1909년 국내로 송환되었고 사면도 받았다. 그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해 홍릉에 묻히자 능참봉(9품)을 자원해 무덤을 지켰다. 그러나 총독부 제시 문구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글을 새겨 비석을 세웠다가 총독부로부터 파직을 당했고, 이내 병사했다.

경력으로 보나, '국모' 시해 범인 처단으로 보나

고영근은 만민공동회 회장, 수구파 대신 처단 기도, 우범선 처단 등 여러 측면에서 대단한 독립지사로 여겨진다. 일본이 사형선고를 내렸고, 조선정부가 구명해낸 것만 보아도 그렇다. 하지만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고영근은 어째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을까? 그를 도와 우범선 처단에 힘을 보탠 노원명도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명성황후 국장 127주기를 맞아 '그것이 알고 싶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 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고영근 #우범선 #노원명 #을미사변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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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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