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뒤로 보이는 도산서원의 초입부. 진도문을 중앙으로 두 광명실이 보인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습기가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최서우
필자가 가장 관심을 보인 곳은 바로 광명실(光明室)이다. 광명실은 누각 형태의 도서관으로서 책의 습기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이 도서관은 제자 고봉 기대승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놓고 서신으로 논쟁하였던 것들을 엮어 놓은 책들을 보관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퇴계는 어리고 한낱 제자에 불과한 기대승의 상반된 화두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사제 간 관계를 뛰어넘는 상대 학자로 대하면서 수년 동안 서신 논쟁을 벌였다. 퇴계의 면모를 보는 것 같다. 필자는 잠시 광명실 앞에 서서 사색에 잠긴다. 제자 고봉 기대승과 스승 퇴계 선생의 거친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해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돌아서 나오는데 정우당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퇴계 선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 열정(冽井)에서 퍼 올린 물로 세안을 한 후 정우당에서 맑고 깨끗한 벗, 연꽃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낙향의 외로움이 밀려올 때쯤 바로 옆 개울 건너 절우사의 벗들과 소회를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퇴계는 절우사의 벗(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들을 직접 심어 가꾸어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쳐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고봉 기대승, 월천 조목 등 적지 않은 제자들을 길러낸다.
도산 서원 앞 고목 느티나무는 그 시절 퇴계나 제자들의 발소리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으련만, 말이 없고 안동 댐의 맑고 잔잔한 물결만이 그저 출렁일 뿐이다.
필자는 돌아서기 못내 아쉬워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다시 생각에 잠긴다. 당시 조정(朝廷)은 퇴계 이황 선생을 도산 서당을 내고 초야에 묻혀 후 학들 만을 가르치도록 그냥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서당에서 학문 정진과 제자를 가르치면서도 조정의 복귀와 사임을 반복한다.
1570년 무렵, 마침내 그는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죽기 나흘 전에 자신의 묘지 앞에 세울 묘지 명(퇴도만은진성이공 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을 손수 지어 남기고 죽던 날 아침 서재에 있던 매화나무에 물을 줄 것을 권하면서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요즘 같은 시절에 난세에 핀 꽃, 퇴계 이황 선생을 다시 만나 뵙고 이 난세를 이겨낼 화두라도 하나 받고 싶은 마음이 어디 필자 뿐이겠는가.
난세에 핀 꽃을 만나다 / 김병모
도산 서당에 들어서 매화나무 길로 걸었다.
후 학들 책장 넘기는 소리에 새들 놀라 담장 밖으로 날아가고
낙수로 흐르는 물고기들도 덩달아 춤을 춘다.
암서헌에 앉아 가르치다 인기척 소리에 버선 발로 두리번거리는데
인걸(人傑)은 없고 만 추에 떨어진 잎사귀만 차갑게 나 뒹군다.
돌아서기 서러워 애꿎은 사립 문만 차이고 먼 산을 쳐다본다.
난세에 핀 꽃, 퇴계
몇 번이나 가슴 졸이며
계곡과 절우사(節友社)의 변화를 보았던고
열정에서 갓 끈 씻어내고 탁수(濁水)에 발 담그고
매화 타고 내려올 퇴계를 기다리다 지쳐
눈물만 가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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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를 만나 난세를 이겨낼 화두라도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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