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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 더부살이하던 신안이 달라졌다

[서평] 황호택·이광표 지음 <서해의 에메랄드, 신안 천사섬>

등록 2024.09.06 11:45수정 2024.09.0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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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에메랄드, 신안 천사섬>은 신안 섬들의 역사와 문화 예술, 꽃 축제와 음식 풍토를 집대성한 기행문이다. 저자들은 1004개 섬들, 서 말이 넘는 흙 구슬들을 갈고 닦아, 씨줄 날줄로 촘촘히 엮어, 보배를 만들었다. 여행기의 백미(白眉)라 할 만하다.

a  황호택·이광표가 쓴 <서해의 에메랄드, 신안 천사섬>

황호택·이광표가 쓴 <서해의 에메랄드, 신안 천사섬> ⓒ 컬처룩


전라남도 신안군은 태생부터 역사 그리고 근대화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쥐구멍'이었다. 그런데 요즘 태양광 발전으로 주민에게 '햇살 연금'도 주고, 섬마다 다리가 이어져 자동차 관광, 휴양이 꼬리를 문다. 외지고 험한 낙도(落島)가 락토(樂土) 되어 간다.


전국 226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인구가 늘어나는 순위로 4번째. 요즘은 목포시가 통합하자는데도 신안은 콧대를 세운다. 아쉬운 목포가 통합을 위해서라면 '목포'라는 지명도 버릴 거라는 말이 나온다. 목포 사람들은 "군청 세울 데도 없어, 목포에 더부살이하던 신안이~"라고 격세지탄(隔世之嘆)이다.

흑산도와 우이도

고려, 조선 시대 최악의 국사범들이 그 섬들에 유배되었다. 흑산에 많을 때는귀양살이가 95명이나 갇혀 있었다. 중국인의 기록 고려도경(1123년)에 "나라의 대죄인으로 죽임을 겨우 면한 자들이 이곳 흑산에 유배된다"라고 되어 있다.

거친 기후 환경을, 맨몸으로 이겨야 하고, 급병(急病)이 나도 약도, 의사도 없다. 오직 면역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게 대를 잇고, 생존해 낸 원시 야만의 본능과 억척스러운 생명력의 유전자가 김대중 같은 하의도 섬 소년들을, 서울 한복판의 정치 토너먼트에서 대통령에까지 밀어 올린 게 아닐까. 거제도 섬 소년 김영삼도 다르지 않을 터.

강한 태풍이 불면, 콘크리트 64t 무게의 테트라포드(방파제를 구축하는 가지 네 개 달린 형상)가 파도에 날아간다. 테트라포드 방파제 480m 가운데 220m가 파손된 것이 2011년, 태풍 무이파가 가거도를 후려친 때였다.


a  드론이 잡은 흑산항 전경. 흑산도 뒤로 외롭게 떨어져 있는 섬이 영산도다.

드론이 잡은 흑산항 전경. 흑산도 뒤로 외롭게 떨어져 있는 섬이 영산도다. ⓒ 신안군


그토록 험하고 척박한 흑산 일대가 신라 이래, 해상의 글로벌 플랫폼 항구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흑산항은 통일신라, 서해를 제패했던 장보고(張保皐) 선단의 국제항구였다. 송나라의 중국 사신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 오갈 때 들르는 보급기지이기도 했다. 중국 사신들의 내왕을 알리는 봉화대와 사신 관사(숙소) 터가 있다.

흑산 바다, 거친 파도에 조난했다가, 고래 등에 얹혀, 살아서 돌아온 박한비의 사연도 한 편의 드라마다. 고래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 그의 마음은 아호 사경(思鯨)으로 족보에 남아 있다.


1800년대 초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를 떠돌다 귀국한 우이도의 문순득도 있다. 홍어를 거래하다 풍랑에 밀려 동중국해를 표류한 문순득. 그가 기적처럼 만난 사람이, 때마침 흑산에 유배된 천주교 사상범 정약전이었다. 약전의 인터뷰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은 역사에 남았다. 드라마보다 더한 구사일생, 3년 2개월의 기록이다.

영산도는 흑산도에 딸린 섬이다. 조선 시대, 왜구 침략이 자심해지자 섬 주민을 뭍으로 소개(疏開)시켰다. 왜구들은 섬사람을 인질 삼아 병참기지로 삼기도 해서, 고육지책이었다. 그렇게 고향을 등진 영산도 사람들은 홍어 팔던 물길을 따라 끝자락 집하장, 지금의 영산포에 짐을 풀고 집결했다. 영산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영산포, 그들을 실어나른 강은 영산강이 되었다.

a  지난 1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의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흑산도아가씨는 가수 이미자씨의 대표곡이다.

지난 16일 전남 신안군 흑산도의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흑산도아가씨는 가수 이미자씨의 대표곡이다. ⓒ 소중한


흑산도는 가요의 여왕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로도 유명하다.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만재도와 하의도

TV 연예 프로 '삼시 세끼'로 유명해진 만재도의 주상절리(柱狀節理). 화산 활동 중 지하에 남은 마그마가 식는 과정에서 수축하고 갈라지면서, 화산암 기둥들을 세웠고, 그것이 주상절리 비경이다. 제주도나 한탄강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신비스러운 미를 뽐낸다.

국내 최초로 섬에서 발견된 산정 습지도 있다. 흑산군도 대장도 이야기다. 그 바다의 안개(海霧)와 화강암, 이탄층(泥炭層, 식물이 죽어 수백년 썩지 않고 쌓여, 물을 흡수 보전하는 층)은 섬 꼭대기에 람사르 습지를 만들었다. 2003년 조류보호협회 회원들이 발견한, 해발 273m 정상에 2만7천 평의 습지. 실로 고개 갸웃해지는 천지 조화가 아닌가.

신안 해저 보물 발굴 스토리는 그 자체가 극적이다. 1975년 증도 방축리 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 몇 개 걸려 나오고, 가치를 모르니 지인에게 선물로 갔다. 어부의 동생인 초등학교 교사는 그 심상치 않은 물건들을 문화재관리국에 넘겨 심의를 받게 했고, 마침내 600여 년 전, 중국 원(元)나라 도자기로 판명되었다.

수중 발굴 경험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해군 해난구조대를 앞세워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굴해낸 신안 보물선은 28.4m 폭 6.6m. 원나라 때인 1323년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일본의 후쿠오카, 교토로 향해 보물들을 싣고 가다 난파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안에서 중국 도자기 2만여 점, 금속공예, 목칠기, 향신료, 후추, 차와 약재, 과일 씨앗이 나왔다. 중국 동전 28t 800만 개와 화물표에 해당하는 목찰 360여 점도 나왔다. 일본 거래처 이름도 적혀 있었다.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이광표 저자는 유홍준 버금가는 전문성과 깊이로, 유려하게, 그 답사기를 적고 있다.

김대중을 배출한 하의도도 섬 전체가 일본인 소작지였다. 조선 인조가 공주를 홍씨 집안에 시집보내면서 섬 농지를 하사했고,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일본인에게 팔렸다. 농민들의 끈질긴 권리회복 투쟁은 1956년에야 비로소 국회의 유상(有償)반환 결정으로 열매를 맺었다.

하의도 DJ 생가는 풍수지리의 배산임수(背山臨水) 명택과는 거리가 멀다. 갯벌을 메운 섬 간척지에 무슨 좌청룡 우백호가 있을 리 없다. 김대중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서자임을 아프게 밝혔다. 황호택 저자는 이를 인용하면서, "생모 장수금이 팔자가 셌지만, 생활력 강하고 자녀 교육에 열성"이라고 평했다.

한국 정치에서 치명적 핸디캡인 서자, 고졸, 지역 3가지 굴레를 쓴 약자. 손에 쥔 거라고는 없이 팔자만 거칠어, 사형장 문턱에서 울먹이던 김대중. 그 빈털터리가 극소의 가용자원(可用資源)을 이리저리 변통해서 기어이 뜻을 이루었다. 그의 성공은 동서고금의 유례없는 이적(異蹟)이다.

장산도는 근 100년 동안 5명의 장관과 국회의원을 배출한 속칭 '5 장관의 집'이 세일즈 포인트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의원인 애국지사 장병준, 그의 동생 홍염(제헌, 2대 국회의원) 그리고, 그들 조카인 재식(3선 국회의원, 산자부 장관), 재식의 형인 충식의 딸 하진(여성부 장관]) 아들 하성(전 청와대 정책실장, 중국주재 대사)이 그 집안이다.

장재식의 장남 하준은 30년 넘게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하다 런던대로 갔다. 차남 하석도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신안군은 인동 장씨 신흥 명문가의 고택을 '허니문 하우스'로 단장했다. 천재 명문가의 기를 받고, 머리 좋은 애를 낳고 싶은 신혼부부에게 5만 원에 예약을 받는다. 기발한 상술이다.

비금도와 팔금도

a  비금도 섬초는 겨울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기 때문에 다른 지역 시금치보다 잎이 두껍고 더 달다. 섬초는 서울의 가락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비금도 섬초는 겨울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기 때문에 다른 지역 시금치보다 잎이 두껍고 더 달다. 섬초는 서울의 가락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 신안군


같은 시금치라도 비금산은 좀 작고 촘촘하다. 잎도 두껍고 색깔도 진하다. 비금도 갯밭에는 게르마늄 성분(국내 유일)이 있어서, 거친 갯바람 영향으로 신선도가 늘 유지되고 당도도 높다. "섬초는 베어내서 일주일 지나도, 물에 담그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라고 자랑한다. 섬 생물의 끈질긴 자생력일까? '섬초'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해서, 서울 농수산물 시장에서 비싸게 팔린다.

섬초의 생명력이 이세돌 바둑에도 풍긴다. 집안의 바둑 유전자는 대단하다. 초급자 세돌을 키운 아버지(교사 출신)는 아마 5단, 장남 이상훈은 프로 9단, 그 아래 차돌은 아마 5단, 큰 누나 이상희는 아마 2단, 둘째누나 이세나는 아마 6단.

세돌은 인공지능과의 대국에서 완패했지만, 딱 한 판을 건졌다. 그 승리는 인간 최후의 승리였다. 이세돌의 가련한 그 한판 승리는, "인간이 100여 년 전, 자동차가 발명된 이래, 달리기 경주를 해서, 딱 한 번 사람이 이긴 것과 같다"라고 나는 평가한다. 그 이세돌은 2019년 은퇴했다. "바둑의 예술적 신비함, 무한 도전 의욕을 인공지능이 꺾어 버린 것도 은퇴의 한 이유"라는 취지로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태양 바다, 바람 개펄에 염부의 땀이 영근 결정체 소금! 신안 염전 700여 곳이 국내 천일염의 80%를 생산한다. 그런데 천일염이 보급된 건 겨우 100년 남짓이다. 조선 시대까지는 바닷물을 끓여 만든 자염(煮鹽)뿐 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팔금도 고하도에 머물 때, 소금을 구워 군자금에 보탰다는 대목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신안 염전의 시작은 1945년 해방 후 평남 용강에서 염전 기술을 배운 박삼만 등이 귀향하면서부터였다. 비금도의 대동염전(국가등록문화유산). 증도의 태평염전(국가등록문화유산), 신의 염전은 신안의 3대 염전이다. 주안 일대가 공업단지가 되면서부터 신안 천일염은 전국을 석권하게 되었다.

시인 최하림을 배출한 팔금도는 봄이면 철쭉이 피고, 유채꽃으로 뒤덮여 옐로우섬 표석이 붙는다. 철쭉공원에 충무공의 군영소 표석이 세워졌다. 1597년 9월 명량대첩을 거둔 이순신은 곧바로 군선을 수리하고 전투를 준비할 새로운 기지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 10월 중순 팔금도를 찾아냈고, 하순까지 머물렀다.

거기에서 아들이 전사했다는 편지를 접한다. 이순신이 팔금도에 머물렀던 기간은 생애에 가장 슬프고 힘겨운 시기였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산다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느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라고 <난중일기>에 썼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참척(慘慽)의 비통함은 끝내 무서운 집중력이 되어, 이은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는 밑거름이 되었다.

책을 지은 황호택 이광표 두 저자는 오래전부터 눈여겨본 필객이다. 옛적 고교 교과서에 실린, 저 유명한 기행문 '그랜드 캐년'의 필자 천관우 주필(동아일보)의 계보를 잇는 스토리텔러라고 감히 말해 본다.

황호택이 1980년대 초반, 동아일보 입사 후, 사보에 적은 각오를 기억한다. 나이에 비해 글이 발칙한 품새로 시작했다. 그는 한국문학에 소설로 도전했던 문학청년이었건만, 대(大)신문의 제작 루틴이라는 새장에 갇혀 살았다. 그 황호택이 자유분방한 기행문 필자로 나선 것은, 운명이고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이광표는 등단 시인이다.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문화유산에 특화된 이력의 기자. 지금은 대학에서 전공을 강의로 펼치고 있다. 그가 입사시험에서 쓴 답안지를 채점했던 나는, 지금도 걸출했던 글 실력을 기억한다. 신안이 당대의, 두 문화재급 필객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가천대 부총장입니다.

서해의 에메랄드, 신안 천사섬

황호택, 이광표 (지은이),
컬처룩, 2024


#신안 #천사섬 #서해의에메랄드신안천사섬 #황호택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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