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여성(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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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도 몇 건씩 제보가 쏟아졌다. 대부분 1학년 여학생들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꾹꾹 눌러 담은 수치와 분노. 남자 선배의 무릎 위에 앉아 소주를 마셔야 했던 그 날의 내가 읽혔다.
위원장을 맡던 선배는 각 단과 대학 회장에게 성 평등 개선을 촉구했다. 당시 거의 모든 단과 대 회장은 남학생이었는데 우리의 목소리를 듣긴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보는 1년 내내 그치지 않는 소나기처럼 쏟아졌으니.
우린 한 해 동안 여러 성 평등 활동을 전개해왔다. 단과대별 여자 화장실에 생리대를 비치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이를 홍보하는 현수막을 제작해 학 내 곳곳에 걸어 놓았다. 여러 남학생들이 '생리대란 부끄러운 단어를 학내에 걸어 놨다', '현수막이 야해서 불편하다' 등의 불만을 제기했다. 생리대가 민망한 건지 또는 여성들을 위한 정책이 불편한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가을 들어 열린 학교 축제였다. 부스 간판에 '오빠, 소주가 나보다 맛있어?', '선배~ 오늘 땀 빼고 갈래?' 등 낯 뜨거운 문구가 걸렸다. 문제를 제기하자 축제 날인데 너무 보수적으로 군다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당시 부스 간판은 지역 뉴스 기사에도 게시 됐다. '성 감수성이 부족한 요즘 대학생'들을 거세게 비판하는 내용이 실렸다.
늘 이런 식이었다. 성 감수성이 메마른 공간에서 우리의 파동은 파도가 될 수 없었다. 한해가 흐르고 총학생회가 바뀌면서 위원회도 문을 닫아야 했다. 자신들을 지켜 달라는 어린 여학생들의 메일을 마지막으로 읽으며 쓰린 마음을 잡았다. 차가운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8년 후인 지금도
몇 번의 겨울을 더 거쳐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직장인이 됐고 2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 대학가에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학내 성범죄를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일어났고 선후배·동기 사이 스토킹과 성폭행, 교제 살인이 잇따랐다. 여자 화장실 벽에 구멍이 뚫렸고 딥페이크 영상들은 얼굴과 실명이 공개된 채 유령처럼 소셜 미디어를 떠돌았다. 여성 혐오가 뿌리가 되어 피해는 가지처럼 무수히 쳐나갔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로부터 8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게 없었다. 어린 여학생들을 무릎에 앉혀 술을 마시게 했던 그들은 자라 사회인이 됐고, 그들의 혐오를 보고 자란 이들이 대학생이 됐다. 범죄는 반복됐고 양상은 지독해졌다. 숭고한 학습의 배움터에서 여학생들은 단 한 번도 안전하고 온전한 공간을 가질 수 없었다.
내가 만일 그날 룸 술집에서 '불쾌하다'며 방을 박차고 나갔더라면. 아니, 학내 성평등위원회 활동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아니, 대학을 졸업해서라도 여학생들을 위해 글 쓰는 걸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작은 어깨 옆에 서서 연대했더라면. 다수가 귀를 열지 않더라도 손을 뻗은 소수를 위해 함께 목소리 냈더라면.
여성들이 지금처럼 이렇게 아프지 않아도 괜찮았을까. 이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지 않았어도 괜찮았을까. 미안해, 언니로서 미안해. 그 공간의 문을 열고 나왔다는 이유로 방안의 어둠을 잊고 살았어. 그 어둠을 끝까지 밝히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남녀공학' 이란 공간이 가진 문제가 문화로 고착화된 게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