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절하는 아버지와 숙부님(오른쪽), 두 분 모두 보청기를 한 것이 보인다.
이혁진
지난 9일 설 연휴 첫날 숙부님이 사촌동생을 앞세우고 예고 없이 집을 방문했다. 명절이면 큰집인 우리 집에서 차례를 지내지만 이번 설은 내가 병중이라 쇠지 않기로 미리 말씀드렸는데 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예고 없는 방문에 동생을 보자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둘은 꺼부정한 자세로 맞절을 시작했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보는 두 분만의 세배다.
숙부님의 예고 없는 방문
아버지는 "올 설은 쇠지 않는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숙부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설을 넘기기 그래서 형님 얼굴 보려고 왔어요."
우리 나이로 아버지는 95세, 숙부님은 92세. 아버지와 달리 지팡이를 쓰지 않는 숙부는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하는 형의 안위를 늘 걱정한다.
숙부는 "엊그제 생전 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금방 가셔서 얼마나 아쉽고 섭섭한지 모르겠다"면서 "꿈꾼 후 무슨 변고가 있을까 종일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잘 지나갔다"고 꿈 얘기를 풀었다.
두 분의 대화는 사소해도 내게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두 분이 약속한 듯 "우리는 이젠 죽어도 감사해야 할 나이"라는 평소 하지 않는 말씀을 해 마음에 걸렸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뜨거운 형제애를 느낀다. 경외감마저 들기도 한다. 6.25 전쟁이 터지자 참전한 두 분은 이때 고향을 등져야 했다.
미수복 개풍군이 고향인 두 분은 고향에 부모와 형제 모두를 두고 내려와 서로 헤어져 이산가족으로 살았다. 외롭고 서러운 실향민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버지와 숙부, 두 형제는 6남매의 첫째와 둘째로 타향에서 75년 동안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만나면 수시로 고향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과 추억을 빠트리지 않는 이유이다.
두 분은 전후 한때 연락이 끊겼다. 실향민 대부분 그렇듯 먹고사는 생업에 바빴기 때문이다. 호구지책에 형제를 찾거나 주변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결혼해 낳은 자식들이 할아버지나 삼촌 등 가족의 소재와 정체성을 묻기 시작할 즈음 두 분은 다시 만났다. 전후 내가 젖먹이 때 숙부님을 보고 처음 만난 건 중학교에 진학하고서다.
1960년대 중반 내가 중학생이 됐다며 숙부가 남대문 시장에서 청바지를 사주신 것은 지금도 생생하다. 청바지는 당시 대학생도 입지 못한 귀한 옷인데 나로선 과분한 대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