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오늘이 추석이야

<미국사는이야기> 27 향수병 걸린 케빈을 위하여

등록 2000.10.01 10:23수정 2000.10.0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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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오늘이 추석이야.
그러니까 내가 어저께 거기 있었으면 시부모님을 따라 일산에 있는 선산으로 나섰을 시각.
그 시각에 겨우 편지로 대신한 추석인사에 시어머니께서 주신 답장을 받아 읽고는 냉동실 문을 열었어.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송편과 찰시루떡을 꺼내 놓는다.


그게 무슨 떡이냐구?
내가 만든 떡.
10년만에 여기 미국에서 만든 송편.
그래, 드디어 송편을 만들었다는 것 아니니.
진짜 쑥까지 으깨 넣고는.

금요일 밤이었어.
전할 말이 있어 민혁이 엄마한테 전화를 했지.
"추석이래요. 알고 있어요? 좋은 시간 보내요."

말끝에 한 마디 붙였을 뿐인데 한숨소리가 줄줄이 나오는 거야.
"몸도 마음도 힘들어 죽겠는데... 날씨는 또 왜 이렇게 궂은 건 지. 계속해서 안 좋았잖아요. 이러면 정말 보따리 싸 가지고 한국 가고 싶더라 구요. 이게 뭐야, 매일 매일 쉬는 날도 없이 새벽부터 뼈빠지게 일 만 하구. 내가 여기서 왜 이러구 사는 건지. 추석은 무슨 추석. 그냥 내일 떡이나 만들려구. 먹구 싶어서..."

"떡? 송편 빚을 거예요? 힘든데 무슨 떡까지 만들어요."
미국 온지 이년만에 정말 밤낮없이 일만해서 부러운 집까지 샀건만 조금만 속상하면 이러다 혼자 훌쩍 한국 가버릴 지 모른다고 씩씩거리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민혁이 엄마.

"응, 내일 저녁에 와요."


내 몫의 일거리들에 밀리고 밀려 하루는 또, 금방 지나고 .
'청소해야 하는데... '
어지럽게 널린 집안은 뒤로하고 애들을 앞세우곤 과일 몇 개와 고물 만드는데 필요하다고 해서 설탕 한 봉지를 들고는 염치없이 민혁이 집으로 갔다.

"떡 집에 갔는데, 송편 몇 개 담아 놓지도 않은 것이 3불 99전이더라구. 그걸 아까와서 어떻게 사먹어. 이사했는데 꿈이 자꾸만 안 좋아서 아무래도 시루떡도 앉혀야 할 것 같고."


아무튼 민혁의 엄마의 극성과 민혁이 할머니의 솜씨 덕분으로 나는 그냥 얹혀서 그렇게나 만들고 싶던 송편을 만들 수 있었어.
우리 딸에게 송편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내가 혼자 그걸 할 수 가 있어야지 말야.
친정엄마라도 가깝게 살면 졸라서라도 진작에 만들었을 텐데.

"서울 식이네."
모양을 내느라고 시간을 들이며 조그맣게 빚어 놓은 내 떡들을 넘겨다보며 민혁이 엄마가 하는 말이지.
큼직큼직 하게 쥐어 놓는 민혁이 엄마의 떡들.
그건 오늘 하루 그녀의 삶이 그만큼 고단했다는 말이다.
거기에 모양과 시간을 들일 마음의 여유도 없이.

"남자가 송편을 예쁘게 잘 만들면 예쁜 딸 난다고 하잖아요. 민혁이 아빠 송편 이쁘게 만들어요?"
그런 말을 하면서 벌써 옛날로 덮어버린 우리 집 모습이 지나갔다.

제사음식을 준비하며 손님을 맞던 엄마의 분주한 모습.
밤을 깎으시던 할아버지.
언니만 더 좋은 옷을 사주는 것 같아 노상 입이 삐져 나오던 내 동생.
드디어 설거지가 끝나고 어수선함이 가라앉을 즈음 밖으로 나가 밤새 달을 치어다 보는 것도 모자라 새벽녘 방안에 촛불을 켜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던 나.

오늘 내 옆에서 송편을 따라 빚는 우리 딸은 이다음에 무얼 기억해 낼까?

송편이 끝나고 찰시루떡을 앉히는 걸 '구경'하면서 김새지 않게 시루에 "밴을 바르는 것"도 모른다며 있는 대로 구박을 듣던 나는 꾸려 주는 한 꾸러미의 떡을 받아 들고는 두루두루 나눠 먹겠다고 인사를 한다.

"주긴 누굴 준다고 그래. 이 아까운 걸. 냉동실에 넣어두고는 두고두고 많이 먹으라니까 그러네."
"아이구, 알았어요."

대답은 그리 하고 나오지만 나는 알지. 민혁이 엄마 맘을.

날씨 탓하며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타고 싶은 건, 친정엄마도 없는 고향이 그리워서 만은 아니라는 걸. 전에 안 하던 힘든 일이 고단해서 만은 아니라는 걸. 나눠주고 싶은 만큼 나눠주지 못하고, 받고 싶은 만큼 받지 못하고 살게 하는 그 상처가 아파서라는 걸.

'정'과 '합리'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이민사회 속에서 아직은 '정'을 더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때로 '정'도 아니고 '합리'도 아닌 것을 붙잡는 자신의 모습이 공연히 슬퍼지기 때문이라는 걸.

꽁꽁 얼어붙은 송편이 녹는다고 해서 막 쪄낸 떡 같지야 않겠지만, 몇 개 되지도 않지만, 저녁때는 그걸 여기 내 아는 이웃집에 돌리려고 해.
여긴 오늘이 추석이니까.
여기는 휴일도 아니야.
모두들 잊은 듯이 살고 있지.
생각도 않기로 했다면서 말야.
그래도, 오늘 저녁엔 고향이 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공연히 서러워 맘 아플 사람 많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추석날에 <미국사는이야기> 다시 시작하며 올리려던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에 기자 재등록이 안 되어서 못 올렸습니다.
<미국사는이야기> 26번 - 가을, 호박속에서 만난 사랑 하나를 읽고 의견을 올려주신 케빈(kevin)님을 위해 오늘 올려봅니다.

그리고 독자의견 '아저씨'님을 위해서도.
오랫동안 가두어만 놓았던 제 눈물을 돌려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지난 추석날에 <미국사는이야기> 다시 시작하며 올리려던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에 기자 재등록이 안 되어서 못 올렸습니다.
<미국사는이야기> 26번 - 가을, 호박속에서 만난 사랑 하나를 읽고 의견을 올려주신 케빈(kevin)님을 위해 오늘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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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가두어만 놓았던 제 눈물을 돌려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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