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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낀 섬진강의 서정 60먹은 교각과 빈배 사이로 머물고 있는 안개 ⓒ 전고필 |
여행에 있어서 기상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 혹은 태풍이 찾아 오는 날 여행을 떠나는 이는 드물다. 모두들 스스로 위험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갖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늘 탓으로 돌리고 동작을 멈춰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여행을 떠난다면 어떻게 될까? 충분히 준비된 가운데 떠나게 되는 악천후 속의 여행에서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한 세계를 만나고 오게 된다.
똑같은 하늘 아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장소를 한두 번씩은 방문하게 되는데, 비슷한 날씨에 떠난 여행이라면 그 여행 뒤의 감상은 대부분 타인이 느낀 감상과 거의 비슷하게 나타날 것이 뻔하다. 인터넷의 문화재 관련 싸이트에서 보게 되는 내용이 모두 비슷한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것은 주변의 기상이나 환경 변화가 주위 풍경과 문화재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저 맑은 날, 움직이기 좋고 잘 보인다는 통설은 과연 맞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단순한 예로 "서산 마애 삼존불"을 찾아가서 태양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삼존불의 미소가 사뭇 달라지는 모습을 한번 경험해 보라. 그리고 태풍이 몰려오는 바닷가의 찻집에서 유리창으로 바다를 바라보라. 분명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안개가 잔뜩 끼어 시야 확보가 10미터도 되지 않는 날, 길을 떠나 본 적이 있는지? 그런 날은 안개가 산과 산 사이를 섬처럼 둘러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아예 통째로 인간 세상을 바다로 만들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제격이다. 그런 곳이 바로 안개 낀 날 선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행지인 것이다.
향가 유원지를 찾아서
대부분의 안개는 인간이 잠들어 있는 사이 스멀스멀 다가왔다가 인간이 눈을 뜨면 사라지고 없다. 특히나 강가에 기대어 살지 않고 평지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게 안개를 친견하는 기회라는 것은 년중에 몇 번 되지 않은 독특한 경험이다.
비가 내린 다음날, 이른 아침에는 안개가 끼는 확률이 높다. 그리고 강변에서 살면 이른 아침 물을 헤치고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볼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안개를 볼 수 있는 곳은 담양 대치 방향의 영산강 언저리나 담양 남면에서 화순 온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유둔재를 넘어서 시작되는 협곡 같은 섬진강의 줄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소 거리가 있지만, 멀지 않은 곳 전북 순창 쪽의 섬진강에서도 자욱한 안개를 볼 수 있다.
옛사람들은 자연물을 인간의 신체에 비유하며 소중히 여겨왔는데, 가령 돌과 바위는 인간의 뼈라고 여기고, 흙은 살, 물은 피, 나무와 풀은 인간의 살갗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안개와 이슬을 인간의 호흡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생각을 가지고 찾아 볼 곳이 있다. 바로 섬진강의 향가 유원지이다(행정 구역: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향가리).
지산 유원지처럼 떠들썩거리지도 않고 시설물도 전혀 없는 곳. 있는 것이라곤 흐르는 물과 산과 그들의 합작품 모래와 굵직한 돌, 그리고 당당히 서 있는 벌거벗은 미루나무 몇 그루, 그것만이 전부인 곳이 바로 향가 유원지이다.
물론 이곳에도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호남의 산지와 평야를 약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철길을 조성할 때 남원까지 이어지는 철길을 만들려고 길이 450미터에 달하는 터널을 뚫었고 섬진강을 건너기 위한 철교를 가설하기 위해 아홉 개의 교각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여직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런 이질적인 경관들이 어느 사이 섬진강과 동화되어 터널에서 바라보는 교각과 섬진강의 안개는 또 다른 아름다운 서정을 만들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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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궁금하게 하는 것 망자를 달래기 위함일까. 단지는 모두 천으로 덮혀 있고 오로지 마지막의 하나만 열려 있는데 그 속에는 고추가 들어 있었다 ⓒ 전고필 |
강폭이 무척이나 넓은 이곳은 족히 50미터에서 100미터 정도의 폭을 형성하고 있는 강줄기이다. 물이 돌아서 흐르기 때문에 호안에 모래언덕과 섬과 층층이 쌓인 돌을 통해 물의 역사를 새겨 놓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른 아침 그곳에 가면 언제라도 안개를 볼 수 있다. 옛적 밤에 담궈둔 쌀에서 조리질을 하며 뜨물을 받아낼 때의 그 탁하면서도 정제된 듯한 색감을 가진 안개들이 강의 자태를 고스란히 감춰 두고 날을 세워내는 곳이 바로 향가유원지이다.
그러다가 아침 햇발이 강렬하게 쏘아붙이면 마지못해 자신의 몸을 풀어헤친다. 한꺼번에 온몸 전부를 드러내는 그런 천박함이 아닌, 서서히 한부분 한부분씩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는 정제된 세련미가 이 강촌에는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거뭇거리는 안개가 물을 박차고 오를 때쯤이면 세찬 물살에서도 수만년을 견디어낸 바위가 머리를 내민다. 뒤 이어 저편 건너에서 노닐고 있는 물오리들이 꽉꽉거리는 울음을 멈추고 이편의 나를 발견하고 놀라 달아난다. 첨병의 역할을 하는 오리가 먼저 물살을 가를 때 곧 이어 군집을 이루는 오리의 비상이 이뤄진다.
아름다운 비행이라 여기지만 그 녀석들에게 있어 나는 그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군일 수밖에 없음이 퍼뜩 생각난다. 그렇게 안개도 오리를 따라 하늘로 자취를 감추어 가면 컴컴하게 물에 머리를 박고 자던 산들도 깨어난다.
길섶의 풀들은 이제 이슬 머금은 자신의 몸을 털어내려 바람을 기다리고 있고 강촌의 사람들은 그 강물을 바라보며 또 하루를 맞이한다. 그들의 삶과 같이 강에 기대어 사는 것이 힘든 우리는 오늘이라도 그 강가에서 거닐어 볼 일이다. 2킬로미터 정도나 되는 강 기슭의 촉촉이 젖은 모래와 자갈을 밟고 거닐면서 잠시간 강물과 같은 삶의 한 단면을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그 장엄한 강물의 역사를 상기하면서 우리들 또한 깨끗하고 청명한 강물의 기운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짐해 보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나 적어도 이 강에서 그런 순수한 마음이 일지 않는다면 이 여행은 완전히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교각의 모습이 완연하게 눈에 뜨이면 이제는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람의 세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여행은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본다는 것은 사실 오탁한 욕심에 불과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이 강가에 다시 가보길 권한다. 그때는 오늘처럼 새벽이 아니라 석양녘이었으면 한다. 황혼이 거뭇거릴 무렵 부지런한 어부는 배를 강심 깊숙이 몰고 나가 그물을 드리울 것이고 하늘의 태양은 진한 황금빛을 발하며 어부의 어깨를 감싸줄 것이다.
아름다운 정경은 이렇듯 두 번에 걸쳐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아쉬움을 너무 많이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인 셈이다.
광주에서 가는 길
어제 내린 비는 11월의 마지막치고는 부드럽게 내린 비였다. 덕분에 창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의 황금빛 잎들이 아직도 남아 가을 햇살을 쬐고 있다.
12월의 첫날인 오늘 새벽 4시 구시청 사거리에서 우리는 옥과를 거쳐 순창 풍산면의 향가 유원지로 출발했다. 어제 우리 약속의 포인트는 안개 자욱한 섬진강과 그 강변에 일제가 뚫어 놓은 철길 터널과 강 위에 반듯하게 서 있는 미완의 철교 지주를 보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아침 안개는 자욱했고 더디더라도 서행을 하며 동광주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옥과에 이르렀다. 옥과에서는 소재지를 다 지나 27번 국도에서 순창 가는 길을 택하였고 주산 삼거리를 지나 다리를 건너 합강 삼거리라는 이정표가 나오는 곳에서 강을 따라 우회전을 하여 7킬로 정도를 달렸다.
그곳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700미터를 오르면 미네랄과 철분이 다량 함유 되었다는 옥출 약수터가 있어 물 한모금 마시고 300미터를 더 가니 오른쪽으로 터널이 보인다. 터널을 따라 조심스럽게 들어가 끝자락쯤에서 살펴보니, 교각이 보이고 좌측편으로 모래 언덕과 주차장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육지 속의 해수욕장 향가 유원지이다.
터널의 끝자락에 향가 식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매기 매운탕이 일품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시간이 없어서 그냥 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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