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상징 솟대가 있는 화순 동복 가수리

등록 2000.12.23 15:16수정 2000.12.2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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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이미지를 찾아서

새천년이었다고 그래서 무언가 다를 것 같고 굉장한 일만 벌어질 것 같던 그 2000년이 어느 해와도 똑같이 모래만큼 많이 어렵고 힘들었으며 아팠던 기억들을 뒤로 한 채,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을 낡은 앨범을 뒤적이듯 내면 깊숙이에서 찾으라하며 또 저물어 간다.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광주와 전남에서 천년의 이미지를 함께 할 수 있는 상징물은 무엇인가? 한번 권해 보라 한다. 고작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무등산의 입석대, 화순 북면 야사마을의 은행나무, 담양의 금성산성, 보림사· 화엄사의 석탑과 석등, 화순 동복 가수리의 솟대 등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와 함께 이곳들을 찾기로 하고 첫번째로 가수리의 솟대를 찾아갔다.

세 가지가 빛났던 동복(同福)

옛부터 전남 화순군은 산세가 그다지 유순하지는 못했던지 두 개의 문화권으로 나눠져 있었다. 한쪽은 능주였고 다른 한쪽은 동복이다.

그중 동복은 무등산의 남쪽에 속하면서 웅장한 산세 속에 세상에 이름을 날린 몇 가지 특산물과 천혜의 아름다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바로 삼복이라고 말하는 "복천어와 복청과 복삼"이다.
섬진강의 첫 머리에 해당하는 이곳의 맑은 물에는 어찌나 고기가 많고 맛있었는지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라는 물고기들을 복천어라고 이름하며 그들의 맛있는 찬거리로 애용했다고 한다.

▲적벽의 전경
물론 이런 좋은 먹을거리는 이 땅 어느 곳이나 그랬듯이 왕에게 진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곳의 은어는 숯불을 피워 고기를 대나무 꼬쟁이에 끼워 타지 않게 훈제를 한 다음 겨울에 얼음을 재워 두었던 만경대에서 얼음을 가져다가 변하지 않게 하여 왕에게 올렸다고 전한다.

더불어 심산유곡의 이슬을 머금고 자라는 꽃들에게서 양분을 얻어 빈 통나무에 꿀을 재워 놓는 한봉을 복청이라고 하며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자 아플 때 먹을 수 있는 보양식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복삼 또한 내력은 마찬가지이다. 알맞은 기온과 습기와 일사량을 이용하여 인삼을 재배했는데 그 효력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동복에서 나는 삼 즉 복삼이라고 칭하였다고 전한다.

그뿐 아니라 1971년 광주시민의 식수원인 동복댐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앞서 말한 세 가지 말고도 두 개의 적벽과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생긴 옹성산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부여한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

아쉽게도 동복댐이 들어서면서 지천으로 찾아오던 장어, 은어 등의 여행길은 물고기가 회유하기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한 높이의 둑이 가로막는 바람에 찾을 길 없고, 게다가 김삿갓조차 그 아름다움에 빠져 이곳에서 숨을 거두며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붉은 바위벽의 적벽 또한 20여미터가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식수원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사람의 그림자조차 거두어 버린 오지 아닌 오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동복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이 웬만한 광주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는 점(물론 지금은 주암댐의 물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과, 수려한 자연과 후덕한 인심을 지니고 부지런하게 살아왔다는 데 대해 자부심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서양화가인 오지호 같은 이가 바로 이곳 사람으로 화풍을 드날렸던 사람이다.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가수리

▲ 옹성산의 모습
가수리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항아리 모양의 산이다. 군부대의 유격장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그 옛날 이곳은 산성이 있었고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고 전한다.
ⓒ 전고필
아름다운 물을 의미하는 가수리는 이곳 동복 말고도 강원도 정선에도 가수리라는 지명이 있다. 동강에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이 맨처음 가탄리와 수미리를 합하여 가수리라는 아름다운 지명이 붙였듯이 이곳 동복의 가수리 또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때 상수리와 상가리, 하가리의 지명을 합하면서 아름다울 가(佳)자에 물수(水)자를 따서 가수리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가수분교에서

옛적 상당히 컸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모두들 대처로 나가고 늙으신 부모들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탓에 가수리의 초입에 있는 가수분교는 잠깐 얼굴을 내민 초겨울볕 아래 콩나무 밭이 된 운동장을 시공을 초월한(?)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만이 굽어보고 있었다.

이 동상만큼은 그 잘나갔던 시절 학교 운동장에 오자미 던지기, 줄다리기, 청백계주 대회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지나간 세월을 다시 더듬어 보는 것은 아련함으로 일렁이게 한다. 그때 그렇게 아름다웠는데 ,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는데, 키가 커 버리고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지금 넓디 넓은 운동장이 몇 평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이었음을 알아 버린 것이 묘한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여행을 떠나온 자의 눈에는 그 모든 정경이 아름다운 추억의 한페이지로 옮겨 볼려는 욕심이 일지만 도처의 산과 들 사이에서 만나는 폐교의 교정에서면 추억보다는 아린 감정들이 무게를 더해 간다.

그곳을 쉽게 빠져 나오는 것은 나의 과거의 그림자를 일순간 부인하는 것과 같기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아직도 바람에 흔들거리는 판자로 된 그네에 앉아 보거나, 녹슨 철봉에 발을 걸치고 물구나무 자세로 본관을 응시해 본다.

그리고 또 나의 기억 저편으로 안테나를 세우며 잠입한다. 몇 장은 깨져버린 네모진 유리창 사이로 검푸른 칠판과 신문을 물에 불려 떼우며 다듬었던 책상과 한쪽이 주춤거린 의자를 바라보게 된다.

다소 감정이 몰입하게 되면 나도 모른 사이에 눈물이 흐르게 되는 폐교의 정경. 가수리는 그런 모습을 아무렇지 않듯 입구에서부터 나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다.


길을 옮겨 벅수골이라는 뜨락의 황량한 겨울을 보면서 마을로 향해 500미터 정도를 가면 약간의 언덕이 조성된 곳에 한 쌍의 장승이 나타난다.

▲하가 마을 입구의 여장승
수수한 여인이 화장을 하였다. 무섭거나 두려움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중에 박힌 백호는 그녀가 여장군임을 느끼게 한다.
ⓒ 전고필
도둑을 예방하고 질병을 막아주는 수호신 장승이 동방 대장군이라는 이름표와 서방 대장군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길섶을 호위하고 있다.

무표정한 듯 보이면서도 동그란 눈망울을 가진 그 화장한 모습은 사뭇 동네의 아주머니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인중에 박힌 백호에서 근엄한 신으로서 손을 모으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장승을 보노라면 내가 여기 서 있는 시간이 벌써 타임머신 속에 한 100여년은 거슬러 올라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뜨락을 벅수골로 부르는 것을 보니 이 마을에서도 이 두 분을 벅수라고 하고 있는가 보다.

곧게 깔린 시멘트 길을 따라 들어서면 당산나무가 개울 사이에 서 있고 본격적으로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과 마을 틀림없이 1반과 2반 사이에 들어섬직한 개울은 위와 아래라지만 너와 내가 아닌 서로 아껴주어야만 살 수 있었던 그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지금은 쉽게 보지 못하는 동네 개울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들의 모습도 이곳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그때는 한번 마실 나갔다 하면 혼이 빠질 정도로 놀아 제끼다 집에 들어갈 때쯤이면 어머니의 눈을 피해 장롱을 뒤지고 빨래감이 된 내 옷은 한쪽에 모여진 빨래더미 안으로 깊숙이 집어 넣고 아무렇지 않는 듯 위장을 했던 시절이 그 빨래터를 보면서 느껴진다. 벌써 아련하게 떠오르는 추억의 순간이 가수리에는 남아 있는 것이다.

마을 중앙의 물을 보며 한참을 거닐면 이번에는 이 지역에서 나온 평평한 돌들을 이용하여 만든 당산이 나온다. 마을을 찾는 길손이나 장사치나 농군이 어울려 술 한잔 마시고 노닐 수 있도록 배려한 돌 의자의 안락함에 젖어 보았다.

수백년전 이곳을 지나던 의병들이 잠시 쉬어 갔을까? 모후산과 백아산을 제집 들어 다니듯 다녔다는 파르티쟌들도 이 의자에 앉았을까?

걸어도 걸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마을 입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당산나무가 해소해 준다. 그 아래서 다리쉼을 하면서 다음 마을이 곧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길손은 금방 아는 것이다. 공간의 미학.

지금 도심의 쌈지 공원은 바로 이런 나무 몇 그루에 판판한 돌 몇 개면 되었던 조상들의 지혜에서 배웠어야 했다. 그런데 있던 나무도 베어내고 자꾸만 넓혀가는 도로는 또 얼마나 많은지...

이제 하가 마을을 지나 뱀처럼 굽은 길을 걸으면서 낡은 옷을 입고 참새와 노루와 씨름을 하던 허수아비가 헤진 팔목을 나풀거릴 때 그 앞의 억새가 함께 사래짓하는 모습을 보면서 물을 사이에 두고 엎치락 뒤치락거리며 상가 마을까지 간다.(하가에서 상가까지는 3킬로미터의 거리이다)


인간의 세월을 품고 있는 솟대

열댓가구가 옹기 종기 모여 사는 상가 마을은 이제는 흔히 볼 수 없는 커다란 소나무 기둥 위에 걸린 오리가 먼저 길손을 반겨 준다.

해마다 2월 초하루면 마을의 액을 막고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세우고 있는 솟대는 이 마을에서는 짐대로 불리운다.

▲벼를 물고 있는 솟대 모습
금방 하늘로 날것 같다. 가수리 사람의 염원을 입에 물고 올해도 가물지 않고 비를 몰아 주시고 풍년이 들게 해 주소서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안고...
ⓒ 전고필
왜 하필 나무에 오리를 얹는 것일까? 옛적 사람들은 나무를 신목이라고 하여 숭배를 하였으며 이런 신앙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방문화권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 뿌리를 지하에 두고 굵은 기둥은 땅에 뻗어나가는 가지는 하늘에 걸렸으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염원을 담아 하늘과 땅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살아 있는 나무의 대체물로서 새롭게 나무를 베어내고 그 나무 위에 형상화된 오리를 얹은 것이다.

하늘과 땅과 물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오리는 사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람의 뜻을 하늘로 전달하는 영적 매개의 역할을 하였다는 오랜 믿음은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더군다나 농경의 사회에서 오리는 물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동물로서 비가 순탄하게 내려 물로 인한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매개이자 화재를 막아주는 액맥이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믿음의 한 형태가 바로 가수리에서는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동쪽으로 두 기가 서 있는데 한 마리의 오리는 지난 여름 폭풍이 거센 날 몸체를 잃어 버리고 나무만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씩씩하게 벼의 낟가리를 입에 물고 꼬리를 마을 방향으로 하면서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다른 쪽에는 한기가 서 있는데 입에 아무 것도 없이 무심히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오리도 항상 순탄치 못한 생을 살았다는 것이 짐대 표지판에 써 있다. 어느 곳이든 그런 일이 벌어졌듯이 자연을 닮은 순박한 이들이 사는 이곳 상가마을에도 새마을 사업이 들어왔던 '70년대에는 미신이라고 하여 짐대를 없애 버리는 그런 수난의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사이에 마을에는 다섯 차례의 화마가 마을을 덮어 버렸으며, 이에 대한 마을 원로들의 의견은 우리가 짐대를 버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래서 78년부터 이 마을에서는 짐대를 마을의 수호신이자 화마를 막아주는 신격으로 인정하고 매년 2월 초하룻날 과일과 북어, 술 등을 차려 놓고 풍물을 치며 제를 지내고 있다.

산천을 닮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생각은 자연과 더불어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순박함으로 여기 짐대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그 솟대 앞에서 느껴 보았다. 아쉽게도 나는 친구에게 나의 그런 마음 혹은 그 친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묻지 않고 다시 내 삶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떠남은 자유이고 돌아옴도 자유이며 그 얻어지는 것 또한 자발적 사유와 느낌의 산물이기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천년의 세월을 본 기쁨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얀 꽃잎을 잃어가는 안스런 모습의 억새들이 그나마 불어오는 몇 점의 바람에 몸짓으로 얘기하는 초 겨울 가수리에 가 볼 일이다. 우리가 잃어 버렸던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 금전 보다는 자연물에 우리의 소망을 키웠던 아름다웠던 우리의 역사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가는 길

담양방면에서 접근하는 길은 887번 지방도를 타고 소쇄원을 지나 화순온천을 지나면 15번 국도를 만난다. 그곳에서 독재터널을 조금 지나면 신율교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가수리의 표지석이 있다.

동복댐의 드라이브를 즐긴다면 물염적벽 방향으로 길을 잡아 댐의 주변을 따라 가면 독재 방향이 나오게 된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가는 방법이 간결하다.
화순 읍내에서 15번 국도를 이용하여 보성 방향으로 가다 탄광이 있는 복암리에서 좌회전하여 15번 국도를 따라가면 가수리이다.
남광주와 화순읍의 버스터미널에서 가수리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버스의 종점은 바로 상가 마을이다.(버스 터미널의 전화 061-372-0039)

덧붙이는 글 가는 길

담양방면에서 접근하는 길은 887번 지방도를 타고 소쇄원을 지나 화순온천을 지나면 15번 국도를 만난다. 그곳에서 독재터널을 조금 지나면 신율교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가수리의 표지석이 있다.

동복댐의 드라이브를 즐긴다면 물염적벽 방향으로 길을 잡아 댐의 주변을 따라 가면 독재 방향이 나오게 된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가는 방법이 간결하다.
화순 읍내에서 15번 국도를 이용하여 보성 방향으로 가다 탄광이 있는 복암리에서 좌회전하여 15번 국도를 따라가면 가수리이다.
남광주와 화순읍의 버스터미널에서 가수리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버스의 종점은 바로 상가 마을이다.(버스 터미널의 전화 061-372-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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