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핀 무등산의 유혹에 당했다

삶에 지쳐 쓰러질때, 나는 그에게 기댈 수밖에

등록 2001.01.12 20:12수정 2001.01.1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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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그 산이 나를 부른 오후.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 폭설 소식이 지속되는 동안 이곳 광주는 매일 비가 내렸다. 겨울비, 너무나 차가운 이미지를 지닌 겨울비가 도심을 질펀하게 만들길 4일만에 드디어 1월 10일 아침, 태양과 상견할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점심 무렵, 하남산단에서 광주 시내로 진입하는 내 눈에 보인 무등산 산자락의 하얀 백설은 이내 모든 해야 할 일들을 빼앗아 버렸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마음이 이미 그 산정에 올라가 버렸기 때문에.

사무실에 들려 장비를 갖췄다. 어떠한 이유도 필요 없었다. 거기 눈이 있고 그 눈이 나를 부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산에 올라야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실 심정적으로 몇 주 전부터 눈이 내리지 않으면 쫓아간다는 식의 억지를 마음 속으로 부리고 있었던 터였기에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일반 카메라와 캠코더, 그리고 감도 100짜리 슬라이드 필림을 챙기고 사무실에 준비해 둔 모바지를 입고 장갑과 배낭을 둘러메고 후다닥 점심을 먹고 무등산으로 향했다.


광주운전자의 필수 연수코스 산장길의 에피소드

태양이 빛을 발할수록 나는 그 백설을 다 보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을 가지고 차를 몰아 원효사가 있는 쪽으로 길을 잡았다.

4수원지, 그곳 청둥오리의 숫자는 이제 5백여 마리를 훨씬 넘고 있었다. 모두들 정겹게 노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간 잊혀진 얘기가 떠올랐다. 광주의 산증인이신 박선홍 선생님의 무등산이란 책 속에 등장하는 뼈(?)있는 얘기였는데, 1970년대 초부터 이곳 4수원지를 찾아온 청둥오리에게 86년 광주 양동에 사는 어떤 분이 매일 이곳을 찾아와 모이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길 얼마 되지 않아 오리들은 이 사람만 나타나면 몰려들어 모이를 받아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이 모습을 본 음식점을 경영하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당신의 오리냐고 묻자, 그렇다고 하면서 그에게 당시 돈으로 200만원을 받고 팔았다가 나중에 사기죄로 고발하게 된 사건이 있었단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과 같은 얘기이지만, 잠시 4수원지 다리에서 그때 팔렸지만 지금은 생존해 있는 오리를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모이를 주면 금방 다가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찰라 괜시리 큰소리로 "훠이 훠이" 하면서 오리를 놀라게 하는 사람, 경적을 울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광주시에서는 이곳에 표지판이라도 설치하고 매년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들의 종류와 특성, 관찰 방법 등을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생태관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멀리 있는 대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시내로부터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바람직한 모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담고서...

광주사람들이 드라이브 코스로 가장 애용하는 길, 80년대와 90년대 운전면허증을 딴 태반의 광주사람들의 운전 연수코스였던 이 길은 언제고 정감이 있는 길이다. 이 길의 막바지에 식영정과 소쇄원을 만날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무등산 등반에 가장 편안한 코스를 택할 수 있다. 물론 군사도로이기 때문에 산길을 걷는 오붓함은 훨씬 뒤떨어지지만...

드디어 차를 놓고 산을 바라보았다. 시내에서 바라본 경관과 600고지 정도는 올라서 바라본 경관이 다소 차이는 있지만 아직도 산정의 하얀 눈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언제 보아도 넉넉한 무등의 모습

▲ 작전도로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
정상에는 눈이 그 시각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전고필
3시 30분 늦재에 차를 두고 뛰듯이 걸었다. 연인끼리 혹은 가족들의 손을 잡고 오르는 몇 사람들, 다정하게 손을 잡고 하산하는 늙은 노부부의 모습들을 보면서 괜시리 나만 허겁지겁 조바심을 피우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오늘 내 산행의 목적은 하얀 백설과 눈꽃과 무등의 낙조를 보고 내려오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쩜 나는 관광전공이라는 자승자박에 끌려 다닌다는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만, 하여튼 나를 손짓했던 그 찬란한 무등산 정상의 하얀 눈을 한시라도 빨리 봐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무처럼 느껴져 뜀박질을 한 것이다.

내가 내 삶에 거푸 지쳐 쓰러지고 일어설 때 그 산은 말없이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터인데 나는 그산을 위해 어느 것 하나 하지 못하면서도 벅찬 설레임으로 그를 향해 달려 가고 있는 것이다.

중머리재에 40분만에 도착했다. 씩씩거리며 호흡을 가다듬고 촬영하기 좋은 장소를 골라 자리를 찾는데 이곳에도 주인은 있었다. 토끼 한 마리가 무단 침입자에게 놀라 억새밭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미처 카메라를 꺼내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항상 그곳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걸음을 옮겨 산꼭대기마다 자리잡은 흉물스런 방송국의 송신소들이 합쳐진다는 며칠 전의 뉴스를 상기하며 입석대로 길을 잡았다.


기둥모양으로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진 입석대와 서석대

화산으로 분출한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갈라진 입석대(1017m)는 언제나 호남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기상의 실체를 시각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해 왔다.

수직으로 각을 잡고 중간이 끊어지면서도 아래를 딛고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우뚝 서서 온갖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기고 있는 바위의 모습은 호남인들의 곧은 심지와 절개,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심벌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 남도인의 기상을 닮은 입석대
남도인은 이 바위의 기상을 닮았다고 얘기합니다.ⓒ 전고필
입석대의 정경을 보며 마치 훤칠한 장부를 이곳 산정에 배치하여 광주를 수성하도록 하느님이 만들어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일 정도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정상으로 다가갔다. 멀리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넉넉한 모습과는 달리 정상 주변부터는 바위가 많은 골산(骨山)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눈이 녹아 물이 되어 흘러내린 등반로의 곳곳은 얼음이 있지만 이제 서석대는 입석대에서 10여 분도 남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눈에 보이는 철쭉나무며 새로 심은 구상나무에 걸린 눈꽃은 따사로운 볕이 내려 쬐고 있음에도 그 녹아가는 속도가 더디어서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녀석도 있고, 고드름을 만들어 눈물을 흘리며 반짝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응달쪽에는 아예 그 무거운 눈을 하루종일 짊어지고 있는 나무도 있었다. 아름다웠다. 무등에서의 그 모든 발걸음이 아름다움의 이상향으로 가는 길 같았다.

서석대는 무등산의 정상은 아니다. 무등산 정상 천왕봉은 해발 1187미터로 지왕봉 인왕봉과 함께 군부대가 상주해 있는 곳이다.

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개방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서석대에서 군부대를 멀겋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 무등산을 등반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등반법이다.

내 자신 또한 예외없이 노을이 비추는 천왕봉의 모습을 보면서 서석대의 아래쪽으로 길을 잡으려 하는데 항상 검게만 보이던 그 천왕봉이 황금빛으로 치장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황금으로 이뤄진 듯한 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석양의 태양이 조화를 부리는 것은 여러번 보아왔지만 이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황홀한 빛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며 수정 병풍이라고 일컷는 서석대의 오른편 아래로 내려오니 서석대 또한 수정 병풍이란 말을 거둬 벌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저 멀리 월출산 자락으로 지는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하듯 서 있는 서석대마저도 그 황금빛의 석양을 거부하지 못한 채 금빛 휘황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벌어진 나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연신 감탄만 하고 있는 사이 어느덧 해는 뉘엿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명멸해 가고 있었다.

함께 간 학생과 사진을 찍으면서 깍두기 같은 렌즈로 보는 것과 내 시야에 걸린 그 장엄한 광경에 대해 얘길 나눈다.

인간의 눈보다 더 정확하고 예리한 것은 없다. 우리가 보는 이 찰나적 순간들의 눈부심은 다시 되살릴 수 없는 것.

▲ 서석대의 황금빛 자태
수정병풍이라고 말한 서석대가 황금병풍으로 바뀌더군요 ⓒ 전고필
그 찰나를 내 가슴에 간직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카메라라는 인공적 도구에 의탁하는 것은 이미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렌즈의 밀고 당김과 빛을 어떤 시차를 두고 받아내느냐에 따라 달라진 인공의 모습이 되고 만다는 점을 상기해 주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커다란 장대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테두리가 형성되고 그 아래는 검은빛이 감돌고 그 위쪽은 푸르스름한 빛이 있는 가운데 지고 있는 둥그런 태양의 모습, 그리고 점점 모습을 감추는 태양의 모습을 서석대에서 바라보는 내 마음은 이보다 더 기쁠일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위에 어둠이 깔리고 다시 하산을 시작해야 할 때 내 발길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아름다웠던 순간의 모습을 이곳에 남겨 두고 저기 별밤의 아름다운 서정을 앗아 버린 도심으로 가야 하는 마음이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불과 두시간 반만에 이뤄진 일인데 산과 속의 가늠이 이다지 크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달빛에 젓어 걸어본 작전도로

하지만 이날 산행의 감동은 여기에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산하는 길, 신작로 같은 작전도로를 타고 오는데 오른편으로 무엇인가 밝은 빛이 떠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여느때와 달리 밤이 되었는데도 우리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광주 시가의 휘황한 불빛이 주는 어지러움 보다 은은하게 다가오는 밝은 빛, 그 빛의 실체는 바로 보름을 하루 넘긴 달의 자태였다.

주능선의 완만한 곡선을 타고 떠 오르는 달빛이 야간 산행자의 어깨 너머로 포근히 감싸주는 광경 앞에서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일 정도였다.

그렇게 눈 쌓인 무등의 초대에 아름다운 겨울 산행을 마쳤다.

덧붙이는 글 | 담양에서 학교를 다닌 시절, 공부를 못한 덕분에 거의 밤이 되어서야 3킬로 정도 되는 집을 갈 수 있었던 나에게 무등산 정상 방공 포대의 불빛은 일종의 나침반과 같은 존재였었다.

약간 흐린 날은 불이 한 개로 보였지만 맑은 날에는 두서너개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저 산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던 그 산에 처음 올라간 것은 고등학교 소풍 때였고 그 후론 해마다 한번씩은 의무적으로 올라갔다(아마 갈곳이 없었기 때문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근로자가 되었을 때, 다시 진학을 하게 되었을 때 어떤 특정한 사안이 있어서 간 것이 아니라 괜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언제나 거기에 있는 그 산에 자주 올랐었다.

하지만 답사를 다니기 시작한 후로는 내 나침반과 같은 무등을 만난지 벌써 3년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늘 가까이 있기에 그 소중함을 망각하고 있었던 그 산에서 나는 곽재구 시인의 받들어 꽃을 되뇌일 수 있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덧붙이는 글 담양에서 학교를 다닌 시절, 공부를 못한 덕분에 거의 밤이 되어서야 3킬로 정도 되는 집을 갈 수 있었던 나에게 무등산 정상 방공 포대의 불빛은 일종의 나침반과 같은 존재였었다.

약간 흐린 날은 불이 한 개로 보였지만 맑은 날에는 두서너개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저 산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던 그 산에 처음 올라간 것은 고등학교 소풍 때였고 그 후론 해마다 한번씩은 의무적으로 올라갔다(아마 갈곳이 없었기 때문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근로자가 되었을 때, 다시 진학을 하게 되었을 때 어떤 특정한 사안이 있어서 간 것이 아니라 괜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언제나 거기에 있는 그 산에 자주 올랐었다.

하지만 답사를 다니기 시작한 후로는 내 나침반과 같은 무등을 만난지 벌써 3년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늘 가까이 있기에 그 소중함을 망각하고 있었던 그 산에서 나는 곽재구 시인의 받들어 꽃을 되뇌일 수 있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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