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가 장애인입니다

강제윤의 <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

등록 2001.03.15 09:23수정 2001.03.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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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와
이제 영감은 물위를 걷는다
예수처럼 걷지만 영감은 평생
한 마디의 말도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하나 남은 팔을 흔들며
할멈이 뒤따른다
저 영감과 할멈은 어디서 온 것일까
수십 년을 한 마을에 살았지만
아무도 그들이 온 곳을 모른다

입으로는 사람의 말을 못하고
팔도 하나뿐이지 않은가!
저들은 적어도 사람은 아닐 것이다
저들은 사람 사촌들임에 틀림없어!
(졸시, '사람 사촌' 전문)


이른 아침 적자산에 오르기 위해 사립을 나섭니다.
안개가 낮게 내려앉아 마을은 자취도 없습니다.
농대 연습림 앞을 지나는데 부용리쪽으로부터 터벅터벅 인기척이 들립니다.
누굴까?
안개 밖으로 몸이 반쯤 빠져 나오는 듯 싶더니 멈칫 합니다.
허리 굽혀 무언가를 줍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이는 필시 일태 영감님일 것입니다.
빈 병이나 빈 박스를 발견한 것일까요.


"오춘, 새백부터 어이 가시요?"
"어 어 어이 강가? 나는 장에 가네"
영감님은 한 쪽 어깨에 나뭇단 몇 개를 매고 또 다른 쪽 어깨에는 빈 박스꾸러미를 매고 있습니다. 나뭇단은 괭이와 호미, 낫 등의 농기구 자루로 이목리 철물점에 팔러 가는 모양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영감님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태 영감이나 개태 영감이라고 합니다.
글이나 숫자를 알지도 못하고 지능도 모자라고 말까지 더듬는 일태 영감님, 이곳에는 영감님이 온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영감님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노화 포전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포전리 전씨 성을 쓰고 있지만 본래의 성은 알 도리가 없지요.
영감님의 나이 또한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민등록이 있으나 그것이 실제의 나이는 아닙니다.
육십이 한참 지난 것 같지만 영감님 본인도 자신의 나이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영감님이 자기가 온 곳을 알고, 성씨를 알고, 나이를 알았다고 한들 영감님의 삶이 달라질 까닭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남의 밭 한귀퉁이 얻어 갈고, 나무 해다 팔고, 빈 병과 종이 박스 주어 모으고,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서 토굴같이 궁벽진 집에 돌아가 지친 육신을 눕혔겠지요.
외팔의 할멈과 함께 사람들의 괄시를 받으며 외롭게 살았겠지요.

이 섬에는 영감님네 말고도 장애인이 여러 사람 있습니다.
그들 또한 일태 영감님네와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땐가 마을 어른 한 분이 일태 영감님네를 가르키며 그러더군요.
"저것들은 사람이 아냐, 사람 사촌들이지"
부끄럽게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의식은 도시나 촌 할 것 없이 여일합니다.


늦은 밤, 문득 깨어 문 밖으로 나섭니다.
열사흘 달은 이미 저버리고 아직 날은 밝지 않았습니다.
여명의 시간은 멉니다.
나는 볼 수가 없습니다.
어둠 때문인가.
아닙니다.
안경을 쓰는 나는 어제 안경을 잃어버렸습니다.
더듬더듬 뜰 앞을 조심스레 걷습니다.

잊고 있었지만 나도 장애인입니다.
다리 하나가 없어야 장애인입니까.
팔 하나가 없어야만 장애인입니까.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해야만 장애인이 아닙니다.
눈이 있어도 안경 없이는 보지 못하는 나도 장애인입니다.
몸은 반듯해도 마음은 뒤틀어진 나는 큰 장애를 가진 인간입니다.
귀가 있어도 아픈 사람의 신음 소리 듣지 못하는 나는 장애인입니다.


내가 다시 안경을 찾은들 시각을 되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안경을 쓴다고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안경 너머의 세상 일 뿐.
나는 여전히 장애인이고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장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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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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